신혼집은 12평 투룸 빌라였다. 그건 유선 청소기를 안 사도 된다는 좋은 핑계였다. 무거운 큰 바퀴를 끌고 여기저기 옮길 때마다 콘센트를 바꿔 끼워야 하는 유선 청소기는 나의 게으른 성향에 맞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쓸기만 해도 집이 깨끗해질 거라는 생각은, 빗자루의 가벼움만큼 가벼운 가격으로 더 산뜻하게 다가왔다.
실로 오랜만에 해보는 비질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사실상 처음이니 십여 년 만에 해보는 비질. 작은 집이어도 먼지는 부지런히 생겨났다. 아침에 일어나 방과 거실 겸 주방을 쓰는 일로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허리를 굽혀 가벼운 빗자루질을 하는 것은 내 신혼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집도 작고 비질도 힘들지 않아 쓸기는 금방 끝났다. 마지막 남은, 쓰레받기.
마트 구석에서 산 빗자루와 쓰레받기는 세트였다. 와, 이거 진짜 오랜만이야. 맞아, 이렇게 조금씩 탈출하는 먼지들이 있었어. 새삼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어찌해도 쓰레받기에 들어가지 않는 작은 먼지들은 대충 마루 틈 사이사이에. 피식, 먼지만 한 웃음들이 새어 나왔다.
비질의 신성함은 쓰레기통 앞에서 빛을 발한다. 쓰레받기에 모여든 집 안의 먼지들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작고 연약한 먼지들을 한동안 바라봤다. 은근히 색이 다른 이런저런 먼지들, 머리카락, 작은 봉지 파편들, 출처와 성분을 모르는 그 무엇들. 그것들은 편해 보였다. 쓰레기통은 마치 먼지의 귀착지 같았다. 긴 여행을 떠나 자신들의 운명의 마지막의 쉴 곳을 찾은 것이다. 청소기로는 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매일 먼지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위는 청소 노동의 고귀함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 주었다. 때론 적고 때론 많은 먼지를 손으로 쓸고 모아 버리며 신혼을 매만졌다.
그렇게 나는 결혼하고 1년 하고도 6개월을 거의 매일 빗자루질을 했다. 지겹지 않았고 힘들지 않았다. 작은 집이라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여겨졌다. 내 손을 주인 삼던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베란다 신세가 된 건, 이사 후였다. 20평형이 넘는 관사로 이사하고 나서는 청소기가 필요했다. 임신 중이었던 나는 허리를 굽히기 힘들었고, 태어나 한동안 누워있을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청소 방식을 바꾸어야 했다. 그렇게 내 손을 거쳐 간 청소기들이 모양을 바꾸어가는 동안 빗자루는 베란다나 신발장이나 세탁기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누구도 숨으라 한 적 없건만, 빗자루와 쓰레받기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꼭꼭 숨어버렸다.
이상한 것은, 나는 빗자루 세트를 단 한 번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무선, 로봇 이런 청소기들이 기세 등등해서 더는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던 빗자루를 감히 - 그렇다, ‘감히’다 - 버릴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내 신혼의 징표였다. 요즘 시대에 누가 결혼하면서 빗자루를 사, 하면 손을 들고 자신 있게 ‘여기요’ 할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어째 나는 그것이 자랑거리처럼 느껴졌다. 검소, 소박 이런 단어를 끌어오기엔 조금 질감이 다르지만, 어쨌든 나에게 있어 빗자루는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대신 말해 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빗자루가 우리 집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건 셋째를 낳고 난 이후였다. 산후도우미 이모님은 로봇청소기 앞에서 난감해했다. 자신의 할 일을 저런 놈에게 빼앗겼다는 표정이었다. ‘저건 삑삑 돌아서 청소가 깨끗하게 안 돼요’라며 말끝을 흐리던 이모님께 죄송하다는 듯 말했다.
“빗자루가 있긴 한데..”
이모님은 ‘빗자루가 최고지요’하며 은신처를 물었다. 조금은 빛바래고 그만큼 수줍은 그들 -빗자루와 쓰레받기- 은 이모님 손에서 오랜만에 춤을 추었다. 35평의 작지 않은 평수를 그들은 쉽게 해내었다. 이모님은 ‘이게 청소지요, 그럼요’를 노래처럼 읊어댔다. 소음 없는 청소 덕분에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이 새삼 가깝게 들려왔다. 그녀의 굽은 등 위에 가라앉는 먼지들이 보이는 듯했다. 평생을 저 각도로 청소하고 키워내고 일구어내셨겠지. 그녀 손 안의 빗자루도 괜스레 숱이 적어지고 그만큼 나이 들고 성숙해 보였다. 지면과의 접촉 부분이 고르지 못해 먼지를 쓸어 담아도 조금씩 새 나가는 쓰레받기마저도 세월의 결과 같았다. 이모님과 빗자루와 쓰레받기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세월을 받아들이고 함께 했다.
지금 빗자루는 다시 신발장 구석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나의 손과 호흡을 맞출 일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것을 버릴 생각이 없다. 먼지를 모두 쓸어 담기엔 조금 어설프고 부족하지만, 빗자루는 내게 그저 단순한 청소용품이 아니다. 빗자루는 내 신혼의 유품이자, 청소로 인한 단정한 일상을 눈으로 보게 해 준 오랜 친구이다. 그것이 안착시켜 준 먼지의 휴식을 나는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