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나에 대해 말할 때 마눌님, 가족, 와이프, 집사람이라고 한다. 다른 것들은 대충 넘어갈 수 있겠으나 ‘집사람’에서는 마음 한쪽이 꽤나 까끌해진다. 틀린 말은 아니기에 따로 반박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고리타분한 냄새를 참기 힘들 때가 많다.
집사람, 단어 그대로 ‘집에 있는 사람’이다. 집에 있는 사람은 무얼 할까. 집안일을 한다. 집안일, 단어 그대로 집 안의 일들이다. 여기서부터 나만의(또는 우리의 혹은 모두의) 문제가 발생한다. 집안의 모든 일들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집사람인데, 나는 그저 ‘집에 있는 사람’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외향적이면서 내향적이기도 하다.(정도의 차이일 뿐 모든 이들에게 이러한 면이 있을 것이다) 집에 있는 게 좋은 이유는, 집에만 있어도 즐겁고 시간이 잘 가기 때문이다. 책 보고 글 쓰고 영화만 보기에도 바쁘다. 그런 의미에서의 ‘집사람’은 좋다. 집사람의 영역을 더 넓히고 싶어진다. 단지, 책을 보기엔 바닥의 머리카락이 거슬리고 글을 쓰기엔 빨래를 널어야 하고 영화를 한 편 다 보기엔 저녁식사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다. 이런 의미에서의 ‘집사람’은 내 삶의 영역에 들이고 싶지 않다.
결혼하고 한동안 몸이 많이 아팠던 이유를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연이은 출산과 육아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쉬지 않고 생겨나는 집안의 일들을 외면해 왔었다. 육아가 먼저라는 핑계를 앞세워 설거지를 쌓아두고 빨래를 개지 않고 뽀얀 먼지에 층수를 더했다. 일어나 해치우면 될 일들을 내 일이 아닌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집사람이지만 집 안의 일들은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그렇게 쌓이는 집안일들은 결국 나를 짓눌렀고 나는 아픈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서툰 육아를 탓했다.
막내가 언니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한 얼마 전부터 나는 육아에서 한 발짝 멀어졌다. 육아에서 겨우 한 발짝 멀어졌을 뿐인데, 집안일들은 세 발짝 정도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내게 가까워진 집안일들을 들여다 보고 적잖이 놀랐다. 집안의 일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 일의 주체가 ‘집사람’ 그러니까 ‘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집마다 다르고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 할 주제이지만, 우리 집은 아직까지 그러하다.
아이들이 크면서 준 여유만큼 나는 좀 더 단단한 집사람이 되었다. 매일 청소를 하고 이불을 정리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고 반찬을 두 개씩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욕실 청소를 했다. 집사람이 자신의 몫을 하자 집은 달라졌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오래된 광고 카피처럼, ‘집은 집사람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낡은 문구가 정답처럼 가슴을 울리곤 했다.
그리고, 내가 없어졌다. 과정은 육아와 같았다. 내가 엄마에 열중하는 만큼 나라는 사람이 없어졌다. 내가 가사에 최선을 다하는 만큼 나라는 사람은 어디론가 휘발되고 있었다. 어디로 휘발되는지 알 겨를도 없었다. 나는 오늘도 집안 곳곳에 부지런히 피어나는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집안일에 매몰되는 나를 발견한 건 이사를 오고 난 후였다. 호우주의보가 없었는데 비가 오면 베란다에 홍수가 났다. 어깨 근육이 빨간 신호를 보내와도 모른 체하고 닦았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베란다에 개울 또는 강이 흘렀다. 시쳇말로 ‘하면 티 안 나고 안 하면 바로 티 나는’ 일에 영혼과 어깨를 갈아 넣고 있었다. 그렇게 가을장마를 보내고 나는 집사람이 아닌 ‘집,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집안일은 어쩌면 자기만족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집안일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안일에 최선을 다할수록 커지는 공허를, 작은 만족과 하찮은 보람이 채우지 못했다. 희생이나 헌신의 가치를 가벼이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일이 '하는 만큼 티가 나는' 일이길 바랐다. 급여같은 건 바라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그저 나의 수고가 최소한의 인정을 받기를 바랐다.
마침내 나는 나의 주 업무인 집안일에 조금은 안일해지기로 했다. 노력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엄마의 헌신과 희생’이라는 명목을 조금은 걷어내고, '그림자 노동'에 나를 잠식되게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집안일에서도 한 발짝 물러서, 그 거리만큼의 여유를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그 여유에 ‘나라는 사람’의 그림자를 세우고 싶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간만 나면 카페로 도망갔다. 그저 카페라는 공간을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실은 나의 주된 일터인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숨기고 싶은 욕망이 속살을 드러내는 거였다. 이제는 집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집은 나이 일터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여유를 챙겨주는 곳이기도 하다.
집안일과의 거리두기, 그 사이에 글을 쓰며 안일하게 지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글을 쓰기 위해 집안일을 가까이 보려 한다. 집안일이 감추고 있었던 색과 향을 찾아내다 보면 진짜 집사람, '집을 아끼는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는 집안일을 애틋이 여겨보겠다는 모순적인 다짐이기도 하다.
'집안, 일'로 채워질 나의 앞으로의 이야기들은, '집, 사람'으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려는 일종의 소동小動이다.
*사진 출처: 블로그 '쑴의 일기장'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집에서의 안일한 일상은 '가족의 건강'이라는 필요충분조건에서만 가능합니다. 가족의 건강을 기도하는 문우가 있습니다. 오형인 저는 도움이 되지 못해 안타까움만 가득합니다. 지정 수혈 가능하신 A형 분들의 작은 실천이 한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필요한 건 약간의 시간과 마음뿐입니다. 부디 들러서 읽어 주시고 챙겨주세요. 부족한 글로나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