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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Oct 04. 2020

내 혀의 '독' 제거하기

가을밤이 빚어낸 '고해'의 시간에 무력해지다

오랜 고민 끝에 노트북을 켰습니다. 아이와 남편이 자는 밤, 나 홀로 깨어있는 가을밤이 여기 앉게 했습니다.

절대 쓰고 싶지 않지만, 마음에 두면 곰팡이처럼 검게 피어나 마음을 덮어버릴 이야기를 쓰려합니다.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고백해야 하기에 많이 두렵지만, 이 글을 쓰고 나면 어쩐지 지금보다는 덜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씁니다.

나약한 고백을 시작합니다.




내 안의 검은 자아를 가장 잘 표현한 두 명입니다. 공교롭게도 다 남자네요.

먼저,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입니다. 혀로 다른 이의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나 역시 그러합니다. 오대수와 같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늘 마음으로 벌을 받나 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에도 검은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아름다운 때일수록 마음의 무거운 구석은 더욱 짙어지기만 하더군요.) 또 다른 내 안의 두려운 자, 영화 '밀양'의 범죄자 학원 원장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를 용서하고자 하는 피해자 앞에서 당당하고 온화한 미소로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역시, 홀로 나를 용서하고자 하였습니다. 용서받기 위해 종교도 가져 보려 노력했습니다. 홀로 용서를 부르짖고 '이만하면 용서받을 만 해'하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용서해보려 했습니다. 결론은, 명백한 실패더군요. 깨닫게 되었습니다. 피해자가 하는 용서만이 진정한 용서임을.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단 한 번도 용서받은 적이 없습니다. 서글프고 처절한 현실이지만, 그들은 모두 그들의 인생에서 저를 '로그아웃', '구독 취소' 해버렸으니까요. 용서를 빌 곳마저 없어져서, 여기서라도 비굴하게 용서를 구해봅니다. 어떻게든 그들에게 닿지 않을까 바라면서.


   


#1. 고등학생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서른이 되던 해, 10년만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졸업 이후 처음 만난 것이다. 반가움도 반가움이지만, 살짝은 어리둥절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연락해서, 어제까지 연락하던 친구처럼 굴더니 갑자기 보자고 한 것이다. 유력 신문사 기자가 되어있었다. 당당하고 멋져 보였다. 마포 전골목에서 본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고등학교 친구들 근황 토크로 이어졌다.

사실 이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은따'였다. 누구와도 친했지만 누구도 그와 그렇게 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적어도 내 주위 친구들은 그랬다.)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0년이 지나고 나서 이 친구를 만나 보니, 그녀는 그런 상황을 은근히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쿨하게 그 당시 자기가 어땠냐고 물어왔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언제 적 이야기냐며 웃으면서 추궁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몇몇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줬다. 그 당시 나의 감정이 조금 실렸나 보다. 그녀는 1시간이 넘게 울었다.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냐면서, 내가 그렇게나 미움 살만 했냐며. 그녀의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은 채였다. 나의 이야기들은 그녀의 상처를 더 할퀼 뿐이었다. 울음 그친 그녀는 다시 쿨해졌다. 그날은 쿨하게 헤어졌지만, 며칠 후 그녀는 내게 컴퓨터 화상채팅으로 절규 비슷한 선언을 해 왔다.


#2. 대학 동기를 한꺼번에 잃은 것만 같은, 거짓말

엄마가 된 대학 동기들 단톡이 있다. 한 친구가 어느 날 자신의 아픈 사연을 전했다. 어디에도 말하지 말라 했지만, 나는 그 단톡에 함께 하지 않은 친구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저 동기들의 근황을 궁금해하길래 전했다.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었다. 단톡 밖 친구는 아픈 친구에게 굳이 안부 인사와 안타까움을 전했다. 아픈 친구는 단톡에서 '누가 내 이야기를 했다. 실망이 크지만 다신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다' 정도로 심정을 밝혔다. 다들 누가 그랬냐며 호들갑이었고, 나는 나로 밝혀질 게 두려웠다. 다들 나를 떠날까 봐 너무나도 무서웠다. '도대체 누가 그랬냐며' 같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 친구는 한 달 후 개인 사정이라며 그 톡을 나갔다.

단순 개인사정인 지 알았지만, 후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과 연락하고 있었다.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연락해 보았지만, 돌아온 건 '읽씹'이었다.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이 친구는 일찍이 '범인'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음을. 나에게 사과의 기회를 주었지만, 나는 뻔뻔한 거짓으로 그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었다. 그 이후 몇 달을 후회의 눈물로 살았다. 몇 번이나-그 친구의 생일, 나의 셋째 출산 후, 해가 바뀌고- 그 친구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타이밍을 놓쳤다. 그녀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다. 그리고 지난 5월 문득, 더는 미룰 수 없어 어느 밤 장문의 사과의 글, 용서의 글을 보냈다. 돌아온 건 '읽씹'이었다.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이 친구는 일찍이 나를 자신의 삶에서 배제하였음을.


#3. 글쟁이에게 하면 안 될 말을 글쟁이에게 해버렸다

마을 문집 모임에서,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ㅇㅇ씨 글은 너무 길어서 안 읽고 넘겨요."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글이 소박하고 담백했다. 직접적이고 순수했다. 기교나 멋스러움은 없었다. 그녀의 글은 동글동글 순둥순둥 한 그녀의 얼굴을 닮았다. 늘 웃는 얼굴이라 그런 이야기는 상처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또 내 나름대로는, 좀 짧고 임팩트 있게 썼으면 하는 의견도 담긴 말이었다.

"나도 긴 글은 안 읽고 넘겨요."

라고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는데, 이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떠오른다. 가끔 그녀를 볼 때마다, 일주일 한 번씩 제출하는 그녀의 글을 볼 때마다 더 생생해지는 것만 같다. 나 역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어서 저 말을 들었을 나를 생각해 보니, 글을 쓰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그것도 눈을 보며 웃는 얼굴로 해버린 것이다. 내 인생의 도려내고 싶은 순간 중의 한 순간이 되어버렸다. 작가에게, 당신의 글을 안 읽는다는 말을 나는 어쩜 그렇게도 아.무.렇.지.도.않.게. 해버린 걸까. 기분 탓인지, 다음 모임에서 그녀는 나를 눈을 보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와의 대화는 피하는 것만 같았다. 그 이후 문집 모임에서 나는 아이 때문에 사담 나눌 시간 없이 집으로 와버려야 했고, 코로나로 인해 모임 자체가 쉽지 않아 버렸다.

그녀에게 얼굴 보며 그 순간의 그 경망스러움에 대해 사과하고 싶은데,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두렵다. 나의 사과를 받아줄지.. 자꾸만 작아진다. 옹졸한 나와는 다르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충분히 사과를 받아들여 줄 수도 있겠지만, 그 상처가 아물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에 쌓이는 것을 '업(業)'이라고 표현합니다.(한자마저 그렇게 생긴 것만 같아요.) 선업을 쌓다, 악업을 쌓다, 업장 소멸하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요. 말로서 쌓는 업을 '구업(口業)'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악한 구업을 쌓아왔습니다. 위의 일들은 남들이 보면 '에이 뭘 이런 걸 갖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제 자신이 몸서리치게 싫어질 정도로 두터운 '죄', '구업'처럼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이 악업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들에게 용서를 받아야만 풀어질 것 같은데, 이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질까요.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이렇게나 비겁한 나입니다. 가끔씩은 내 혀의 '독'이 그들에게 준 상처가 너무나도 크게 다가와서, 제발 그들을 다시 대할 수만 있다면 싹싹 빌면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만 싶어 집니다. 순전히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요. 이렇게나 이기적인 나입니다. 지금도 조금이라도 홀가분해지고 싶어 이렇게 사죄의 글을 끄적이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앞으로도 내 혀의 '독'을 완전히 제거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오롯한 '수양'이 필요하겠지요. 그 수양의 시작이 사과하고 용서받는 일일 것입니다.


나의 경솔한 말로 상처 받은 모든 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깊은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미안했어요. 용서를 구하고 싶으나, 그것은 주제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넓은 마음이 괜찮다고 할 때, 용서해도 될 만큼 상처가 보듬어졌을 때, 그때 용서받고 싶어요. 그러한 용서야말로 나의 '악업'을 없앨 수 있는 진정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부디, 나로 인한 상처 잘 아물게 하고 행복한 나날 보내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들이 느낀 상처에 비하면, 참회와 후회의 눈물은 가볍게만 느껴집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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