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는
취향입니다
라는 첫 문장을 써놓고 오랫동안 발바닥을 비빕니다.
보일러를 켰습니다. 방바닥이 따뜻합니다. 따뜻한 방바닥 덕분에 따뜻해진 발바닥을 오래 비빕니다. 따뜻한 발바닥이 더 따뜻해졌습니다. 보일러는 오랜만에, 오래, 사람의 온도가 되었습니다.
라고 써놓고,
이게 산문시가 될 수 있을까,라고 아주 조금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시는 우리의 발아래와 모니터와 왼쪽 어깨 위와 겨드랑이 옆에 있습니다. 공기로 습기로 소리로 온도로 감정으로 있습니다. 곳곳에 존재하는 시를 어떻게 감지하고 잡아내고 느끼고 써내고 흡수하고 받아낼 것인지, 이제부터는 문제가 되고 때에 따라 머리가 조금 아파질 것도 같습니다.
취향, 이라는 단어를 다시 가져와야겠군요. 감히 제가 보건대, 시는 취향입니다. 시를 좋아하는 이에게 제가 좋아하는 시를 보여주면 '이 시는 별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햄버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맥도널드를 저 사람은 맘스터치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둘 다 햄버거라고 대답합니다.(시를 이야기하는 중에 근사하지 못한 비유를 들어 미안해요, 그러나 이것이 저다운 비유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것에 관한 이야기도 시로 쓸 수 있어서, 그래서 시를 좋아하는 저 다운 비유라서요.) 다시 밝히건대, 시는 취향입니다.
어떤 취향으로서의 시를 좋아하고 쓰는 이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만으로 오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낮이 아직 여름이던 어느 날, 시에 관한 이야기로 편지를 주고 받고 싶다 했을 때 '와 너무 좋다'라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저는 간지러운 기대를 해버렸습니다. 어쩌면, 시의 취향에 대해 오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아. 다른 무엇도 아니고 시에 대해, 시와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이와.
오래 발바닥을 비볐을 때 행복해지는 계절에
시의 취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좋아하는 시인을 물었을 때가 기억나십니까. 허수경 시인이라는 대답에 조금 놀랐습니다. 작년의 어느 스무날 동안 그녀의 시를 필사를 했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자두나 수박, 포도나무와 같은 시가 있었습니다. 과일의 향香이 묻어나는 시들이었지만, 어떤 와닿음, 시적 와닿음은 - 적어도 그때의 내게는 - 없었습니다. 내게 허수경의 시는 약간의 과일 취取향香이었으나, 그대에게는 그녀의 시가 그대의 취향趣向이었던 것이지요. 그대의 그 취향이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우리의 첫 이야기로
허수경 시인의 시가 어떠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괜스레 발바닥을 더 비벼보며,
사람의 온도를 배워버린 보일러의 마음을 헤아리며.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진샤의 물음에 대한 폴폴의 발행은
일주일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화요일은 우리가 정한, 시를 나누기 좋은 요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