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를 주저앉히고 나를 일으켜 세운, 잉그리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영어여!

by 진샤

영어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1학년 들어가 ABCD를 시작한 것이었다.

남들은 학원에서 꽤 하고 왔지만, 사교육에 관심 1도 없었던 우리 엄마 덕에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사선지에 A와 a를 그려가며 영어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나름 타고난 발음인지 발성인지 음성 덕분에, 9월에 있을 강원도 교육청 배 중학생 영어연극대회 멤버에 뽑힐 수 있었다. 주관 영어 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은 아니고 옆반인지 옆 옆반인지 하여튼 마녀처럼 생긴 김희정 선생님이었다(이름도 잊을 수 없다. 내 외국어 인생을 통틀어 최대 빌런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하우아유 아임 파인땡큐 앤ㄷ유? 말곤 아무것도 없는 날 무얼 믿고, 강원도 시골에서 온갖 치맛바람 다 날리는 엄마들의 자제들 속에 집어넣은 건지 모르겠다. 두세 번 해본 연습에서 그녀는 늘 나에게 '아직은 다듬어진 게 없지만 조금만 잡아주면 정말 괜찮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다듬어진 게 없는 게 화근이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서 두 번째 난쟁이 정도로 지정될 줄 알았던 배역 발표날, 내가 아닌 다른 아이로-공부 잘하고 영어도 나쁘지 않은데 이상하게 영어연극대회에 뽑히지 않은 아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고, 그 선생님이 아닌 연극반 다른 아이에게서 "너 오늘부터 연습 나오지 마래"라고 한 마디만 들었다. 희정킴은 진정한 마녀였다. 그리고 그 아인 당당하게 서브 주연(왕비)까지 맡았다!(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론, 그 아이 엄마가 연극 멤버 모집 처음부터 그 선생에게 온갖 마음을 다 갖다 바쳤는데, 결국 그 날 그 선생이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학교에 전혀 신경 안 쓰는 엄마가 처음으로 아주 조금 미웠었다.)


그 날 내 안에서 구겨진 건 14살 여자아이의 단순한 자존심뿐 아니라, 외국어에 대한 자신감 그 전체였다.(강원도 시골 중학교 대표였던 우리 학교 팀은 도대회에서 준우승했다. 나 대신 들어간 아이는 후에 외고를 진학했고, 그 후 그 아이의 삶은 모르겠다.)



그 이후로 영어는 겨우겨우 내신 유지할 정도의 점수만 이어갔고, 사실 쳐다도 보기 싫었다. 수능 점수도 안 좋았다. 영어를 어떻게 공부하면 좋을지 몰랐을 뿐 아니라, 거의 하지도 않았다. 인문계인데 영어를 안 했으니, 아주 좋은 점수가 나올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영어를 피해 중국어과를 갔고, 중국어는 영어와 다른 외국어니 완전 다른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제2외국어로 하고 학원도 미리 다니고 살다 온 애들 앞에서 뽀포모포부터 시작하는 것 역시 쉽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영어는 아니었다.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했고, 2학기엔 학년 탑을 넘어 4학년 전체 과탑 성적을 받았으며 연속 두 학기를 그렇게 장학금을 받았다.

그래도 막상 슬슬 졸업 때가 되니 역시나 문제는 영어였다. 특히, 대학입시보다 힘들었던 신방과 복수전공을 받고 진심 새 삶을 사나 싶었는데, 언론고시 스터디는 토익 800 이상이 면접 조건이었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는데 단 하나 뚫을 수 없었던 관문, 토익 800. 노력해 보았지만, English의 En까지 보고 토 나오는 그때의 나에게는 포기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기자의 꿈은 내 안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지겹도록 따라붙은 토익 몇 백 이상. 졸업이야 우야무야 어찌했지만, 입사도 그렇고 어디서나 일단 영어부터가 시작이었다.


20대 중반 인생 리셋하고 싶어 종교철학에 몸담은 적이 있었다.(인생 리셋은 실패했지만, 마인드 리셋은 대성공했다!) 동양철학 중 인도철학이었고 그 공부만 가열하게 하고 싶었는데, 인도 철학만 가열하게 하려면 영어가 기본이었다. 모든 텍스트가 영어였다.

하아.. 이마저도 나를 버리려는가..


방학의 두 달을 꼬박 영어에 올인하기로 마음먹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영어에 내 인생을 책잡히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두 달을 꼬박 도서관에 바쳤다. 국가고시준비생처럼 도시락 싸들고 매일 텐투텐 영어만 했다. 엎드려 잔 시간이 더 많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내 영어는 이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느낀다). 다음 학기 인도철학 영어 독해 시간이 전혀 어렵지 않게 느껴졌으니.

다음 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다. 1년 열심히 중국어 하고 열심히 영어 까먹고, 한국 다시 와서 중국어 선생님 2년 하면서 CNN 수업 청강을 열심히 했다. 돈 벌면서 영어 하면서. 이때가 문법과 발음이 제대로 교정된 시기다.


내 안의 학구열의 정점, 석사를 시작했다. 석사 논문학기 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시간에 쫓겨 쓰면서도 적잖은 영어 논문과 학술자료를 읽어 내려가며 쓴 걸 보면 나의 영어가 아주 바닥은 아니었구나 싶다. 하긴, 석사 2년간 완전 미국파 지도교수님 아래서 거의 영어 텍스트만 읽었는데도 크게 무리는 없었다. 이때가 내 학구열과 영어 실력이 정점을 찍은 때인 듯하다.


셋째를 임신하고 있던 2019년, 중학교 영어 처음 시작할 때 이후 처음으로 영어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무언가를 공부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으로 영어를 했는데,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영어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시골 동네 맘 카페에 아무나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테드 스터디 모집글을 남겼는데, 아메리칸 남편과 사는 영어 선생님이 역제안을 해오셨다. 자기도 공부해야 한다고... 이럴 수가. 그렇게 매주 스터디와 여성회관 회화수업과 매일 영어 원서 필사까지, 영어로 가득한 태교를 했다. 뱃속에서 영어를 공부한 아이를 출산하고 꼬박 1년째, 영어는 STOP, ing이다.




내 안의 영어의 역사이다. 보잘것없고 유창하지 못한 내 영어가 많이 부끄러웠던 시절이 길었다. 그러나 성장해 왔다. 오롯이 내 의지와 노력으로 내 영어를 키워왔다.


육아로 멈춘 것들 중 가장 아쉬운 것이 영어이다.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다시 ABCD부터 해야 하는 나의 영어가 조금은 안쓰럽지만, 내 아이들의 ABCD는 내 14살의 ABCD와는 전혀 다르다. 여전히 성장해 나갈 나의 영어는, 내 인생을 닮은 구석이 있다. 나를 주저앉게 했으나 나를 스스로 서게 했고, 지금 잠시 멈춰 있다. 앞으로의 나의 영어와 나의 성장은, 아이들과 함께할 것이다. 나와 내 영어의 성장에 아이들이 함께 해 다행이다, 외롭지 않아서. 14살의 내가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어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