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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n 30. 2023

캠퍼스에서

조금 웃었다



  칼국수집이라고 기억하던 곳은 마라탕집이 되었다. 사실 칼국수집은 그곳이 아닐지도 몰랐다. 예전 칼국수집이 어딘지 가물가물했다. 골목의 풍경은 익숙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짚어내긴 힘들었다. 시간은 풍경도 변하게 했고 나의 기억력도 변하게 했다.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2000년대 초에도 이미 오래된 가게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모교를 가면 무조건 그 칼국수를 먹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발표수업에서 교수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해 창피한 얼굴로 울먹이며 내려온 날도, 좋아하는 교수님께서 ‘드디어 공부의 맛을 알게 되었군’이라고 하시면서 웃어주신 날도, 들떴던 개강 날도 더 들떴던 방학 날도 칼국수를 먹었다. 졸업하기 얼마 전 오천 원에서 육천 원으로 가격이 올랐지만 그땐 미련도 없는 예비졸업생이었다.

  담백한 맛을 기대하고 왔기에 마라탕보다는 옆 쌀국숫집으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검색을 했다. 칼국수집에 관련된 마지막 블로그 포스팅은 2012년에 멈춰 있었다. 없어진 지 10년은 넘었을 칼국수집을 찾는 나의 꼴이 괜스레 우습게 느껴졌다. 

  사진첩을 열었다. 방금 찍은 사진들은 다섯 장이 채 되지 않았다. 졸업 때와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풍경들만 찍었다. 펜을 고르던 문구점과 졸업 직전 사장님과 친해져서 아쉬웠던 복사집, 아침 수업 전 따뜻한 베지밀을 사러 가던 편의점, 돈가스보다 양배추샐러드가 좋았던 돈가스집. 그 외의 풍경은 모두 변해 있었다. 대학 건물들은 리모델링을 하여 근대화를 벗어나 모던해졌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좋은 핑계가 있어 자주 피했던 중앙도서관 앞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소리도 없이 운행되고 있었다. 은행나무로 기억하던 나무는 알고 보니 전나무였고 사회과학대 앞 붉은 대자보들은 컬러풀한 취업대자보로 바뀌어 있었다. 교환학생으로 보이는 흑인 여학생이 벤치에 앉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아직 여드름도 걷히지 않은 여러 얼굴이 큰 소리로 인사하는 곳을 보니 이제 막 여드름이 걷힌 선배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삼 년 선배는 하늘보다 더 높게 느껴지던 때가 떠올라서, 조금 웃었다. 겨울만 스무 번 가까이 지나는 세월인데도 변함이 없는 건 변함이 없구나 싶었다. 학교 안과 밖이 거의 변해도 여드름만큼 퍼져가는 청춘, 꼭 잡은 손에서 번지는 설렘,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큰 열정, 그 모든 것을 받아내는 젊음 같은 건 거의 변하지 않았다. 

  김이 올라오는 쌀국수의 숙주를 들여다보았다. 옆자리에 홀로 앉아 먹는 젊은이는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먹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기운을 내어 무얼 할까? 토익책을 펼칠까, 고시 공부를 할까, 기업 전형을 살필까, 아니면 창업 지원 강의를 들을까. 여자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럴 행색은 아니었다. 무엇을 하든 저렇게나 씩씩하게 먹는 젊은이의 젊음을 곁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조금 웃었다.

  학교 앞이라 상대적으로 저렴해도 맛은 절대적으로 좋았다. 한 그릇을 비우고 다시 둘러보니 테이블도 의자도 걸려있는 액자도 먼지만큼 시간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시절만이 건넬 수 있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오래된 것만이 풍길 수 있는 특유의 정서. 그러고는 다시, 조금 웃었다. 어느새, 오래된 것들 속에서 웃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마흔. 지금 이곳에서 유난히 내 나이의 많음을 실감하고 있지만 책을 읽을 때나 지혜를 얻고 싶어 만나는 이들 앞에서는 내 나이의 적음을 실감했다. 인생의 계절로 치면 지금은 짙푸른 녹색이 가득한 여름인데 나는 거의 매 순간 이 여름이 낯설다. 처음 맞는 인생의 계절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어려워하고 있다. 어느 자세도 불편했던 어느 날, 대학 졸업장을 받아 든 건물에서 버스로 20분 거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졸업장을 받아 들던 날의 컴컴한 기쁨 속에서, 나는 알지 못했다. 인생은 그날로 커다란 끝을 맺고 단 하나의 시작만 있을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그날은 소소한 끝이었고 그만큼 소소한 시작과 끝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사 오기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마흔의 어느 시간을 이곳 그러니까 이십 대의 종지부처럼 느껴졌던 곳에서 지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둘러본 캠퍼스에서 문득 깨달았다. 인생은 캠퍼스였다. 때론 계단 앞에 때론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게 되는, 얼마 전 입학한 재학생과 오래전 졸업한 졸업생이 같은 뜨거움을 들이켜는 곳. 많은 것이 변했지만 사실 많은 것이 변하지 않은 곳, 그럼에도 추억하러 오기엔 추억이 추억처럼 남아있지 않은, 그로 인해 나의 성숙을 조금 실감할 수 있는 곳.

  젊은이는 국물을 남기지 않고 일어섰다. 허기를 채운 젊음이 보기 좋아서, 창밖의 전나무가 듬직하게 서 있어서, 조금 웃었다. 






월간 에세이 7월호 게재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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