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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an 19. 2021

나를 부러워하는 이들에게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아니,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네요. 40년을 채 못 살았고, 엄마가 된 지는 만 6년도 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저'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꽤 있다는 것을 요즘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저'란, '아무 걱정 없이 아이만 키워도 되는 저'를 의미합니다. 흠, 그렇습니다. 맞아요. 저 정말 시쳇말로 먹고 살 걱정, 노후 걱정 안 하고 그저 아이만 키워도 됩니다. 사랑스러운 딸 셋과 매일 지내며, 오히려 이렇게 취미 생활로 글까지 쓰고 공모전으로 용돈벌이도 하고 있고, 이보다 더 호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어머니도 늘 그러시지요, 우리 진샤는 복도 많지, 진샤는 호강에 겨웠지, 요즘 너처럼 집에서 놀면서 애만 키우는 사람이 어딨니, 다들 나가 돈 버느라 죽을 맛이지, 자기 새끼 크는 거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렇습니다. 복에 겨워서 이렇게 아이들 재우고 글도 쓰고 합니다.


   저를 부러워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크게 두 부류입니다.

   후배가 저한테 그래요, 언니가 세상에서 젤 부러워요. 일 안 하고 아이만 키워도 되잖아요. 우리 남편은 무조건 복직하래요. 저는 꿈이 현모양처거든요, 정말 잘할 자신 있는데 일하래요. 아기 보고 있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일하러 가지요, 복직할 생각 하면 지금도 눈물 나요. 친척 언니도 비슷하게 말해요. 야야, 니는 얼라(아이)만 보고 있어도 되니 그 무슨 팔자가 그리 좋노. 부럽다야.


   또 한 부류는 이런 경우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와 오랜만에 근황 토크를 합니다. 잘 지내니. 뭐, 매일 똑같지, 너는. 나도 뭐 매일 똑같이 애들이랑 지지고 볶지. 좋겠다, 귀여운 아이들이랑 매일 복작복작, 부럽다.


   세상에. 제가 이렇게나 부러움을 살 위치에 있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제가 얼마나, 어떻게 부러움의 대상인지 이들이 일깨워 주네요. 그들이야말로 저의 부러움의 대상인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요. 일 좀 하고 싶은데, 복직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내가 일한 만큼 보수도 받고 그러고 싶은데, 그만 좀 복작복작 하고 싶은데(복작복작 아니고 지지고 볶는 거라니까!).






  요즘 젊은이들(.... 저는 요즘 젊은이는 아닌 게 확실합니다)이 많이 한다는 MBTI, 잘은 모르지만 거기서 분류 기준 중 내향성 vs 외향성 이런 게 있는 것 같더라구요. 나이가 들면서 내향성이 강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내향적인 데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사람, 저입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지요. 이 것은 기질이나 성향이라서 옳다 그르다로 논할 것이 못 됩니다. 그저, 그런 사람인 것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육아를 힘들어합니다. 24시간 끊임없이 돌봐야 하는 존재가 옆에 있으면 쉽게 지칩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이들과 있는 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과 있으면 행복이 샘솟는 사람들이 보면 저는 너무 행복한 상황이지만, 사실 저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더 많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거든요. '아무 걱정 없이 아이만 키워도 되는 상황', 사실 제게 가장 큰 걱정이 아이들과 매일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아이러니이지요. 이 아이러니를 매일 지고 살려니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전업주부는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는 이인데, 제가 해 보니 육아와 가사는 병립 불가한 항목들입니다. 육아에 전념하려면 가사의 일정 부분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 저의 경우는 식사와 청소는 기본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지 않으면 지금 겨우 하는 육아도 못할 것만 같아요. 이와 비슷하게, 위에 언급한 '현모양처'라는 말도 양립 불가한 단어입니다. 현모(賢母)를 하려면 양처(良妻)가 힘들구요, 양처(良妻)를 하려면 현모(賢母)는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해요. 물론 가능한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 같은 깜냥을 가진 사람은 상상이 안 됩니다. 육아와 가사를 완벽히 해내는 자, 현모양처를 꿈꾸거나 자처하는 자.

  저는 태생적인 기질이 약간의 게으름을 부리기 알맞은 무거운 엉덩이를 타고나 공상을 좋아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깁니다. 한량이 제격인 것이지요. 음.. 작가를 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성향입니다.(옛날에도 한량들이 술 마시고 후대에 길이 남을 명문을 남기곤 했지요) 그러다 보니, '엄마'를 하기에는 매우 좋지 못합니다. 엄마의 제1조건은 '부지런함'이거든요. 사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좋은 전업주부, 현모양처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요. 가벼운 엉덩이와 부지런한 손만 가지면 쉬운 것이 전업주부, 현모양처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어요. '못났다', '그것도 자랑이냐'라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엄마로서는 오히려 욕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맞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그저 그런 사람인 것을요.

   저 역시 부지런해 보려 무던히도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또다시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게 부지런을 떨면 떨수록 '본연의 제가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본래의 저,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이 없어지더라구요. 그저 '엄마'만 남는데, 그게 참 서글퍼지는 일인 겁니다. 저도 우스웠습니다. 제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노력했는데, 좋은 엄마가 될수록 슬퍼지는 내 모습이란. 그래서 요즘은 제 나름의 답을 내렸어요. 적당히 안 좋은 엄마하고, 최소한의 나를 지키자고. 아이들에게 적당히 할 건 하되 부지런하지는 않은 엄마, 아이들이 자고 나면 내 것을 찾아내는 나. 물론 내 것을 찾는 행위의 절정은 '글쓰기'입니다. 이 시간을 가져야 다음 날, 아이들에게 그래도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더라고요. 진짜 나를 버리고는, 도저히 행복하지 않아서 아이들을 봐도 기쁘지 않더라고요. 이게 제가 내린 나름의 절충, 합의안입니다. 웃기고 있네, 다 변명이야,라고 하시면 역시나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게 저의 최선이라고, 제가 살아내기 위해 찾은 나름의 최선이라고요.






   시댁에 갔다가 막내를 3월부터 어린이집 보낼 거냐는 질문과 동시에 엄청 우려 섞인 목소리를 잔뜩 듣고 왔습니다. 남은 남이야, 남의 손에 어떻게 아이를 맡길 생각을 하니, 최소한 아이가 자기 의사 표시는 할 수 있을 때 보내야지, 어쩜 그렇게 쉽게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길 생각을 함부로 하니, 최소한 기저귀는 떼야 보낼 수 있지 않겠니, 이 딱한 것을 어찌 보내니, 나는 못 본다, 내가 데리고 키워야지. 이렇게 이쁜 것을 매일 보는 게 행복 아니니, 이것도 순간이야, 아이는 엄마 손에 커야지 남한테 함부로 맡기는 것 아니다, 아이 키우는 것 보는 게 엄마의 기쁨이고 일이야, 너는 일하는 것도 아니잖니, 아이들 보내고 집에서 뭐할 거니, 집에서 할거나 있니, 아이와 있으면 심심하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 최소한 여름 이후에 보내 보렴, 여름이 뭐니 다섯 살은 되고 말은 해야 그런 데 가는 거지.

   하나같이 맞는 말이라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대답하지 못한 대신, 저는 종일 앓아야 했습니다. 먹은 것이 콱 막혀서 심하게 체하고야 말았습니다. 결국은 다 토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생리통과 체한 것이 합쳐져 시댁에서 드러누워만 있는 못된 며느리만 하고 왔습니다.


   매일 3월 2일이 오길 바라는 저입니다. 못났게도 막내마저 어린이집 보내면 무어 할지만 상상하는 엄마입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해집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막내 임신 때 제가 만들었던 영어 스터디를 잠시 쉬고 있었는데, 얼마 전 다시 시작했지만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 육아 중이니까요. 영어 스터디, 필사, 독서, 영화보기, 글쓰기, 운동, 미술관... 이렇게나 하고 싶은 게 많지만, '애는 어린이집 맡겨놓고, 집에서 할거나 있니' 이런 말을 들으면 차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좋은 엄마는 할 수가 없어서요' 하면 천하에 매정한 엄마가 되어버립니다.

   오히려 아이랑 있으면 모든 짜증을 아이에게 털어버리기 때문에, 아이는 티브이 말고는 놀 거리라곤 없기 때문에(엄마가 놀아주지도 않고 어떻게 놀아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아이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어린이집 가는 게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엄마의 천성적인 기질 따위는 절대적으로 무시됩니다. '엄마'라는 단어가 품어야 할 가치들이 우선시 되는 순간, 저 같은 엄마는 늘 하류 엄마로만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체한 몸으로 못난 며느리, 못난 와이프, 아프기만 한 엄마만 하고 집에 왔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집에 와서 아이들과 있으며 대충대충 하고 재우고 여러 작가님 글 읽고 쓰고 하다 보니 하나도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엄마'를 하기엔 거리가 먼, 그러나 엄마를 해야 하기에 노력하는, 하지만 여전히 그게 잘 안 되는 사람.



   그러니 제발, 부디, 함부로 저를 부러워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 걱정 없이 아이만 키워도 되는' 저, 사실 저는 그게 가장 힘드니까 제발 아무렇지도 않게 부럽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전혀 기쁘지 않고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뿌연 그 무엇이 마음과 마음 사이를 가로막아버리는 말이 되니, 삼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런 제가 최근 참 기억에 오래 남는 말을 들었습니다. 12월에 생일이 있었는데, 생일 축하해주는 대학 동기 녀석이 건넨 말입니다.


   저더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말해줍니다. 행복한 아이임을 기억하라고 해줍니다.


   저의 처지와 마음 상태도 모른 채 무턱대고 부럽다고 하는 말에는 거부감만 들었는데, '너 행복해 보여' 이 말은 감촉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행복과는 무관한 사람이라 생각했거든요. 행복 같은 건 제 근방 100m 내에는 없는 것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누군가가, 저를 꽤 아는 이가 저를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줍니다. 제가 차마 몰랐던, 어쩌면 저 스스로 무시해왔을지도 모를 행복을 잡아보라고 말합니다. 막연하게 제 주변과 제 상황만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건네는 건조한 부러움에선 느끼지 못한 촉촉함이 스며 있습니다. 그제서야 부유하고만 있던 제 행복이 형체를 갖고 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소소함'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게 되면서요.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 하며 많은 시간 지치고 기 빨리지만, 그 사이사이 톡톡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눈망울 이런 것들에 담겨 있는 행복을 잡을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봄에는 아이들을 모두 어린이집에 보낼 것입니다. 하루를 저의 시간으로 충전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하원 후 아이들을 품도록 할 것입니다.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충만한 저녁 시간 보내겠지요. 그때, 맘껏 부러워해 주세요.
철 모르는 지금의 부러움은 감히 사절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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