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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Feb 19. 2021

생존 신고

다시 브런치에 글을 쓸 날이 올까 싶으면서도,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되겠지, 막연한 예감은 있었습니다. 글이 쓰고 싶어 야위어가다 '오늘 글을 쓰지 못하면 내일 나는 눈뜨지 못할 거야' 이렇게 심히 오바스럽게 생각되는 그런 날이 오면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와중에(생각보다 잘 지내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되어 저도 사실 조금 놀라고 있습니다.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연락을 주시 몇몇 작가님, 구독자님들에게 일일이 답을 할 시간적 상황이 되지 않아 브런치 글로 대신 답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이번 한파의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어제 하루 유난히 여러분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작가님 글이 그립다는 분, 그냥 안부 여쭙는다는 분, 건강 챙기시라는 분. 그 전 메일들을 애써 무시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몇 분이 약속한 듯이 연락을 해 오시길래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꺼냈습니다.

맞아요. '노트북을 꺼냈습니다.' 손이 잘 가지 않는 곳,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습니다. 노트북이 보이면 글이 쓰고 싶어 질까 봐요. 노트북을 오랜만에 꺼내고도 역시나, 열기까지 꽤 오랜 시간과 고민이 있었습니다. 열고 나서는 어떤가요. 한참을 키판을 바라보다 손을 올리기까지 예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브런치를 열자, 얄궂은 민트색 알람이 있더군요. 어느새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식, 브런치 알람. 아, 어쩌지요. 손이 떨려오기 시작합니다. 겨우 숨죽여 놨던 글 쓰는 자아가 숨을 토해내기 시작한 것 같아요. 


브런치 글들을 발행 취소하고 앱도 지우고 오도독을 탈퇴하고 글감 목록을 모두 삭제하고, 문자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 단 한 번도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은 사람처럼요. 자꾸 떠오르는 글감들은 켜켜이 쌓이다가 눌어붙어 화석이 되었지만, 그래도 시간과 공을 들여 떼어냈습니다. 흔적은 남았지만, 어쨌든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침에 눈 뜨면 갑자기, 설거지하다 갑자기, 드라마를 보며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툭툭 터져 나왔지만 - 그 이유 역시 명징하게 알고 있었지만 - 그냥 닦아내기만 했습니다. 저는 글을 쓰지 않을 거니까요. 

열심히 드라마를 보고 최선을 다해 폰 게임을 했습니다. 브런치 앱 자리에 게임 앱이 자리하니, 인류의 초창기를 지내는 원시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전 글을 쓰지 않을 거니까요. 한 판 한 판 열성을 다해 깨나갔지만, 이전 같은 희열은 없고 그저 눈 시림과 공허만 레벨업 되었습니다. 다행히 한국 드라마는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볼만해졌더군요.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기 좋았습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덕질도 해보고, 드라마 기사 검색도 처음으로 해 보았습니다. 시간이 잘 갔지만, 잘 가는 시간을 아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중요하지 않았어요, 무얼 어찌 해도 저는 글을 쓰지 않을 거니까요. 


예상치 못했던 것은, 몸이 아파왔다는 사실입니다. 두통과 이명과 소화불량이 심해졌어요. 손떨림이 시작되었고, 7살 딸보다 기억력은 더 나빠졌습니다. 원래 안 좋았던 기억력이 유아 수준이 되었어요. 악몽과 불면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글은 읽지도 않고 보지도 않았어요. 도서관 앞에서 한참을 울었으면서도, 책을 쥐면 다시 글이 쓰고 싶어 질까 봐 그냥 지나친 나 자신 칭찬해, 하다가 또 왈칵 울어 버렸어요. 


그렇게 지냈습니다. 어느새 머릿속에서 끊임없던 타자 소리도, 문장이 써지던 소리도(연필심이 지나가는 사각사각 비슷한 소리였어요) 둔탁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나 원하던 평범한 아줌마가 되고 있었지요.(여기서의 평범한 아줌마는 글 쓰지 않는 엄마사람입니다) 물론 중간중간 연락 주신 감사한 구독자 분들, 작가 분들의 메일에 와장창 무너지는 날들도 있었지만, 그런 날은 그냥 울면서 지나가면 며칠 후엔 또 괜찮아지곤 했습니다. 



제 글이 그립다는, 그래서 글쓰기가 재미없어졌다는 작가님, 저의 부재 때문에 브런치를 지웠다는 구독자님, 일생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신 작가님, 그저 기다리겠다는 구독자님, 어느 때라도 미국 오면 무료 숙박을 제공해주신다는 구독자님, 존버의 시간을 함께 견디자는 작가님, 다른 건 필요없고 건강만 잘 챙기시라는 구독자님, 다른 작가님의 좋아요 를 누르다 보면 외도하는 기분이 든다는 구독자님, 그리고 인스타를 통해 염려의 마음을 보내오신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나 과분하게 생각해 주시고 마음 써주시는지, 그 마음들 하나하나 헤아릴 여력도 능력도 없는 저라서 이렇게 못나고 어설프게 감사와 안부의 인사 올립니다. 


제 글을 그리워하신 분들, 이 글로 마음 공간이 조금 채워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먼 곳에서 투병 생활과 삶의 또 다른 바닥을 열심히 닦고 계시는 작가님들, 언젠가 반드시 그 결실이 원하시는 바 그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조용히 노력의 담금질을 하다 보면 그 결실 역시 어느 순간 조용히 눈 앞에 와 있을 겁니다. 

버티다가 다 내려놓고 다시 또 다른 존버의 시간을 견디시는 작가님, 굳이 '존나게' 버텨야만 하나, 를 생각하다가 '존나게'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마음인 것 같아 저 역시 마음과 눈의 습도가 높아졌답니다. 저 역시 '존나게' 버텨보려 결국 브런치를 열고야 말았어요. 헤아려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작가님들 글 열심히 보시며 거기서 웃음과 재미와 감동 느끼시면 순수하게 좋아요 누르시고 댓글 쓰시면 됩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봄이 오면 또 웃고 괜히 쓸쓸해하다가 맛있는 것 먹고 밤엔 좀 시크해지고 울적해지고 그러시면 됩니다. 외도하는 기분 같은 건 없으셔도 되지만(오히려 제가 죄송해지지만) 그 마음이 너무 귀여워 이 글을 쓰게 되었어요. 



이 글이 언젠가 다시 쓰게 될(언제가 될까요.. 언제가 오긴 할까요) 글의 교두보가 될지, 곧 쓰일 글의 예고편이 될지, 브런치의 마지막 글이 될지는 저 역시 모르겠습니다. 사람 일이란, 에는 늘 비슷한 뒷말이 따릅니다. 알 수 없는 것 또는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사람 일이란 그런 거니까, 저의 글 역시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살아 있습니다. 잘 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살아 있습니다. 글을 쓰는 일상이라면 잘 산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글을 쓰지 않아 '잘' 살았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어요. 어쨌든, 몇몇 분의 염려를 덜어드려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생존 신고합니다. 


늦었지만, 다들 새해 복 많이 챙기시고 건강도 잘 챙기시고 주변의 안녕과 그 안에서의 여유 모두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곧 3월이네요. 그렇게 기다리던 봄과 마음인데, 제 마음의 계절은 조금은 더 추울 것만 같습니다. 이 겨울을 헤처 나가는 동안, 여러분은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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