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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05. 2021

어느 심약한 갈등 회피자의 하루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왜 그리 아이들을 볶았는지, 왜 아침부터 모든 짜증을 아이들에게 쏟아부었는지, 왜 내 목은 샤우팅의 상처로 얼얼해야 하는지, 왜 나는 이리도 못난 엄마인지, 도대체 왜 매일 아침을 이런 기분으로 시작해야 하는지를 곱씹고 곱씹었다. 곱씹을수록 쓴 맛만 나는 생각들이었다. 울적함의 깊이를 더하려는 순간 막내가 엄마의 옷을 잡아당긴다. 빠빠, 빠빠. 밥 달라는 소리다. 아침의 후회를 곱씹느라 아이 밥도 안 챙기고 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또다시 재생되는 그 생각, 나는 왜 이리도 못난 엄마인가.

  급하게 밥을 먹인다. 먹이는 중에 전화가 온다. 네 고객님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동의해 주신,으로 시작하는 상냥한 언니(?!)이다. 짜증과 답답함이 확 밀려온다. 당장 끊고 싶은 마음이지만 너무 친절한 목소리라 짜증이, 그래서 당장 끊을 수 없는 나에게 답답함이. 어쩔 수 없이 네, 네, 하다가 어 어어 아이가 밥을 흘려서요,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전화 주세요, 라며 마무리한다. 언니가 상처 받지 않도록 나름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아니면 어쩌지, 마음이 쓰인다. 전화 때문에 아이 밥 먹이는 걸 소홀히 한 것 같아 아이에게 미안해진다. 엄마가 이 모양이라 너만 고생이구나.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관리실에 물어보라는 건 어찌 되었냐고 묻는다. 아차, 늘 아차로 시작한다. 애셋 낳고 4세 수준의 기억력을 갖게 되었는데도 육아 핑계로 제대로 챙기는 것 하나 없다. 한소리 듣고 나면 자책이 썰물처럼 밀려 들어온다. 익숙한 자책인데도 매번 밀려 들어올 때마다 신선한 서러움도 같이 들어온다. 기억력 어쩌고 애 키우느라 어쩌고 해 봤자 의미 없는 싸움만 남는다. 극도로 심약한 갈등 회피자이기에 그런 말은 애초에 꺼내지도 않는다. 피할 수 있는 갈등은 무조건 피한다. 문제는 관리실에 전화하는 것이다. 그런 일로 전화하기엔 좀 사소한 것 같은데, 바쁘신 분들 쓸데없이 오라 가라 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여쭤보긴 해야 할 텐데, 와서 괜한 걸음 하시는 건 아닐지. 용기 내어 전화해 보니 바로 와주셨다. 큰 어려움 없이 수리해 주셨다. 역시 전화해 보길 잘했어. 저분들의 역할이 이렇게 도와주시는 거니, 도움받을 일 있음 도움받아야지. 작아진 마음이 조금 부풀어 올랐다.

  세탁소에서 전화가 왔다. 맡긴 세탁물의 오염이 안 빠져서 다시 환불해 준다고 한다. 어쩔 수 없지 싶다가도 조금은 화가 나는 듯도 하다. 처음에 물어봤을 때는 자신 있게 다 된다더니, 지금 안 된다는 말하는 목소리는 어찌 이리도 건조한 지. 그러나 심약한 갈등 회피자는 '안 좋은 말 해서 좋을 게 뭐 있나, 감정만 상하고 남는 거 하나 없지. 어차피 환불해 준다고 하니 됐지 뭐' 하는 마음으로 더 말을 꺼내지 않는다.

  아이들 하원 시간이다. 마주 오던 아이가 폰만 바라보다 툭 치고 지나간다. 얼굴도 안 보고 '죄송합니다' 하는 목소리에 죄송은 1g도 없다. 마음에 불길은 치솟고 있지만, '잘 보고 다녀' 한 마디로 가던 길 간다. 갈등회 피자답게 초등학생을 앞에 두고 독한 말 해서 무어 하나 하는 마음이 크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어쨌든 죄송하다고 했으니 다음엔 알아서 하겠지, 남의 자식인데 괜히 잡았다가 아이가 상처 받을 수도 있어하고 말아 버린다. 속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심약하기만 한 갈등 회피자이기 때문이다.


  어째 어째 아이들을 재우고 노트북을 켠다. 심약한 갈등 회피자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심약한 데다가 갈등을 안 만들려 하고 피하기만 하니, 마음에 넣어 둔 말들이 많다. 상대방이 상처 받을까 봐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쌓이고 쌓인 말들은 안에서 곪았다. 다행히 이 심약한 갈등 회피자는 자기 마음을 꺼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들을 꺼내어 글을 짓고 잘 말리면 된다. 글은 그 모든 것의 '처방전'이었다. 글이 쓰라는 대로 쓰고 나면 마음에서도 한 아름 덜어내고 차마 향하지 못한 상대방에 대한 미운 마음들도 정제되어 밖으로 나왔다. 글을 써서 마음을 꺼내는 일만큼 갈등 회피자에게 어울리는 일은 없었다.





  호구되기 딱 좋은 심성이다. 나약하고 유약하며 피하기만 할 뿐 맞서지 못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다가 상대방만 좋게 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서로 맘 상하지 않았으면 되는 거지. 기가 막힌다. 누구 보다도 갈등 회피자 자신이 가장 답답하다. 답답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나고 자랐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빠는 그저 대화를 좀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나랑 얘기 좀 하자' 그 한 마디에 갈등 회피자는 입을 다물었다. 아빠는 궁금한 것들을 물었을 뿐인데 대답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될까 봐, 싸우게 될까 봐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때는 3시간씩 침묵했다. 아빠는 그런 딸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감정적인 말 또는 가시 돋친 말을 해야 하는 때는 늘 눈물부터 났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병신 같아,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느라 말하지 못했다. 겨우 입을 열어도 독한 말의 독성이, 가시 돋친 말의 가시가 눈물에 녹아 사라져버린다. 그런 날은 어떤 종이든 어떤 펜이든 붙잡고 휘갈겨 썼다. 차마 뱉지 못한 마음속 단어들, 눈물로만 세상으로 나오고 차마 입으로는 나오지 못한 독한 말들. 그 말이 상대방에 전해지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갈등 회피자에게 '쓰는 행위'는 감정의 독성을 풀어내는 일종의 '해독제'였다.



  





  며칠 전 동생과 대화를 나누다가 갈등 회피자는 자신에 대한 답을 찾았다. 독설과 상처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 그러니까, 쉽게 상처 받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아파하고 또 들여다 보고 후비고 상처를 키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상처 받을 테니까, 독한 말 하지 말아야지. 상처 주지 말아야지. 그냥 넘어가야지, 어쩔 수 없잖아. 더 해 봤자 기분만 상할 텐데, 상처만 받을 텐데 그만 하자. 그러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에는 어쩔 줄 몰라했다. 자신은 상처 받고 상대방은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럴수록 더 심약해지고 더 회피했다. 그 불균형의 중심에서, 위태롭지만 그래도 곧게 서보려 노력한 흔적이 글쓰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심약한 갈등 회피자의 도피처였던 글쓰기가, 갈등의 발단이었다. 갈등 회피자의 주특기가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니 그 갈등을 피하기 위해 글을 피했다. 자신의 처방전과 해독제를 모두 버렸다. 잘 살아낼 자신은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글쓰기를 회피하던 그 밤, 밖에는 진눈깨비가 안에는 눈물이 오랫동안 내렸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을 그저 피해 왔다. 모든 갈등과 모든 안부와 모든 염려와 모든 대답을. 예전처럼 그저 안에 쌓기만 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며 넘어가기엔 자신의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바깥과의 갈등을 회피하다가 자기 안의 갈등과 갈등하고 있었다. 사실 갈등 회피자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해독제가 적힌 처방전을 다시 찾게 되리라는 것을. 살기 위해 다시 글을 불러내리라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그의 숨은 안에서 말라버리게 될 테니까. 밖으로 향하지 못한 말들 속에서 납작해져 버릴 테니까.



  살아야 할 시간이 왔다. 자신과의 갈등마저 글로 풀어낼 수밖에 없는 심약한 심성, 그 지점에 서서 하얀 바탕의 검은 커서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커서가 깜빡이는 횟수만큼 갈등이 녹기 시작한다.  





돌아왔습니다.

순전히 제가 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혹시라도 반겨주시는 이가 계시다면 다행일 듯합니다.

연락 주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 마음 글로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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