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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14. 2021

쓰고 싶지 않았던 편지

그거 알고 있니. 나는 자신 있었어, 너를 마주치지 않게 될 것을.


그래, 나 역시 그랬어. 세상 사람들 다 너를 미워하니까, 나도 그렇게 되더라. 어쩔 수 없잖아, 너는 미움받을 존재니까. 억울하다고는 하지 말아 주길 바라. 너는 미움받으려고 존재하니까. 

그래서 나도, 무던히도 너를 멀리 하고 무시하고 요즘 말로 '거리 두고' 그랬어. 그리고 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을 거라고, 늘 확신하고 지냈어.

그냥, 그랬어. 집에 있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하고 집안일하고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사실 너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나 겨를도 없었어. 나에게 무존재 같은 느낌이랄까. 몇몇 친한 친구들은 가끔씩 너를 떠올리게 하는 말들을 했어. 넌 괜찮니, 그렇게 계속 무시하며 지낼 거야, 언제까지고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지내기는 힘들어, 너도 참 심하게 무던하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 내가 이렇고 나의 환경이 이런 것을. 

그렇게, 너는 나의 일상과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어. 내가 자신했던 이유지, 너의 존재 자체를 무존재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무뎌지고.. 세상 밖에서 넌 너대로, 나는 나대로.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래 우린 서로 처음부터 그랬잖아, 계속 그렇게 지내 왔어. 지내야만 했어.


정말 우연히, 그래 모든 것은 '우연'에서 시작하지, -얼마 전 읽은 시구가 갑자기 떠오르네. 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심보선,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中)이라는- 너무나도 우연히, 그래서 더 운명같이 너를 마주했어. 운명 앞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데, 너를 떠올리는 운명 앞에는 부정적인 부사들 뿐이야. 피하고 싶은, 멀리 해야 할, 참혹한, 더러운, 한심한, 불길한 같은. 늘 그랬듯, 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당연히 너를 알아챌 수 없었지. 인정해, 내가 당한 거야. 속수무책으로. 너는 조용히 내 곁에 있었지만, 눈치 없는 나는 그저 내 볼 일만 보고 떠났어. 복수하듯 내 곁에 다가온 너, 성공했구나. 그 환호마저 너는 침묵이었어. 침묵이어서 나는 더욱 내 소란에만 집중할 수 있었지.


너의 최악은, 너의 잠식을 모두의 것으로 만든다는 거야. 제발, 제발 나만 흔들면 될 것을, 무슨 억한 심정으로 나의 소중한 이들을 다 건드리는 건지. 그래, 그것이 너의 존재의 힘이지. 내 주변에 대한 복수가 진짜 복수라는 걸 잘 아는, 네 더러운 존재의 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어. 나도 너의 실체를 맞닥뜨리기로 했어. 어려운 일은 아니야, 약간의 고통은 있겠지만 너를 드러내는 것이 나와 내 소중한 이들을 살리는 길이니까. 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마음이니까. 그래, 인정해, 나는 너에게 졌어. 그래서 너를 만나기로 했어. 다 필요 없이, 몸뚱이 하나만 끌고 나와 너를 향했다고. 내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니.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눈 앞에 펼쳐진 건, 나의 긴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가족과 영문 모를 아이들의 표정, 나와는 관계없었어야 할 새하얀 얼굴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무얼 그리 잘못 살았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미세먼지 가득한 뿌연 하늘 밑에서 탓할 그 무언가를 찾다가 문득, 아, 아아아아, 눈물이 탁 나 버렸어. 각오보다 꽤 많이 울었어. 아주 보란 듯이, 네가 갈취한 승리의 생채기를 남기더구나. 잠시였지만 깨달을 수 있었어, 너의 비열함과 비겁함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왜 이런 너를 그리도 무시해 온 건지, 과거의 나를 탓하면서, 진짜 너를 찾는 과정에서 조금 헤매기만 하고 돌아왔어.


밥을 하고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토닥이고 혼내기도 하고 재우는 그 모든 일상의 시간 속에서, 차분한 척 얼마나 너의 본모습을 기다린 줄 아니. 그 불안과 그 불확실과 그 와중에 '어쩌면 네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조금의 희망이 교차했어. 심장 박동만큼 불안-불확실-약간의 희망이 차례대로 내 몸속에 혈관을 타고 흘렀어. 

아침에 눈을 뜨고, 내가 너무 무리했나부터 시작해서 나와 아이들의 머리를 짚었어. 너에게 깔끔하게 패배한 나를 받아들이기를 부정하며 시작하는 하루, 비참한 운명.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지, 늘 그렇듯 밥을 차리고 먹이고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틀어 주고. 중간중간 떠오르는 너의 만행에 분노하면서도, 분노 빼고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나에게 또 분노했어. 

아주 약간의 희망을 조금씩 키워 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폰이 울렸고, 나는 확인했어, 나의 승리를. 나의 승리를 이렇게나 간단하게 확인한다는 것에 일순간 분노했지만, 그러기엔 승리의 기쁨이 분노를 꺼버리더라고. 

네가 나를 스쳐간 그 모든 과정을 다시 떠올렸어. 그래, 너는 분명 나와 함께 했지만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어, 나를 우습게 볼 기회. 나는 나를 지킬 하얀 힘이 있다는 걸 새삼 느꼈어. 앞으로도 그럴게, 너에게는 그 어떤 기회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이런 거지 같은 편지도 다시는 쓰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 제발, 앞으로 어떤 연관도 맺지 말자, 그렇게 죽어 줬으면 좋겠어. 


그거 알고 있니, 최후의 승리를 갖게 될 것은 나라는 걸, 그리고 이 편지를 읽게 될 모든 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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