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다툼 후(정확히 말하면 일방적으로 혼나는 것이다, 내가) 남편이 자주 하는 말이다. 물론 나는 ...에 담긴 남편의 말을 알고 있다. '진짜 똑똑한데 나랑 결혼해서 수고가 많아요' 비슷한 뉘앙스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은 또 다른 가지를 키운다. '진짜 똑똑한데 요즘 왜 이러나요' 같은 뉘앙스다. 그렇다. 나는 똑똑한데, 어찌 되었던 지금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학생 때는 똑똑했다, 아니 똑똑해 보일 줄 아는 학생이었다. 똑똑함의 비결은, '질문'이었다. 국민학교(매번 밝히지만 국민학교 졸업한 사람이다) 저학년 때 우연히 궁금한 게 떠올라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 나이는 손을 드는 데 용기나 눈치 이런 게 필요 없는 나이였다. 선생님은 대답해주시고 한 마디 하셨다.
"똑똑한 아이구나."
이상했다. 궁금해서 질문했는데, 나는 똑똑한 아이가 되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칭찬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똑똑한 아이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주 손을 들고 질문했다.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선생님들은 손 들고 질문하는 학생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럴수록 더 질문했다. 특히 수업 끝날 때 선생님들이 하는 빈 말, '질문~!'을 나는 빈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무슨 질문을 할까'하는 생각으로 수업에 집중을 못할 정도였다. 수업 종이 치기 직전에 하는 말에 굳이 손들고 질문해서 자주 반 친구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으나, 순수한 나의 친구들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곤 했다. 4교시는, 나 역시 급식실로의 전력 달리기가 필요한 시간이었기 때문에4교시만큼은 질문은 넣어 뒀다.
질문은, 대학 수업 중에 특히나 유효했다. 정치학이나 인도철학과 같이 사상이나 철학 수업 시간은 사실상 내 차지였다. 어떤 때는 나의 질문만으로 1시간 반, 2시간이 꽉 채워지기도 했다. 시험을 잘 보지 못해도 A+는 기본이었다.(슬슬 재수가 없어지려 하고 있다) 그래서 과탑이나 장학금도 많이 했고 받았다. 어디서나 '똑똑한' 학생이었다. 인도철학 공부할 때는 교수님이 서울대로 옮기시면서 석사를 지원하라고 하셨다. 같이 공부하자는 말을 뒤에 숨기심을 뻔히 눈치챘으나, 역시나 문제는 돈이었다. 아무리 국립대여도 석사는 석사였다. 나는 사실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그저 '똑똑한 척' 하는 걸 잘하는 것뿐이기에 그런 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미련이나 후회, 아쉬움 같은 감정이 마음의 빈 곳을 채우려 할 때마다 '나는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아' 하며 빈 곳에 난 구멍을 메우기 바빴다.
진짜 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만 정부 장학생으로 전액 학비를 대주는 전공이었다. 경쟁률이 높았지만, 나는 순전히 학점 하나로 모든 이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입학했다. 2년 동안 역시나 즐거운 질문으로 가득한 석사 생활을 했다. 오랫동안 공직에 계셨던 50대 동기 선생님께서는 늘 안타까워하셨다. '진샤 씨처럼 똑똑한 인재가 자리를 못 잡아서 어떡하누' 그 때 나는 160만 원 월급 주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분이 보시기에 나는, 똑똑한데 자리잡지 못한 안타까운 젊은이였던 것이다.
20년을 똑똑하게 살아오다가, 아이를 낳으면서 나는 '헛똑똑'의 대명사가 되었다. 할 줄 아는 것,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내가 낳은 아이인데, 도대체 왜 우는지 왜 자지러지는지 왜 아픈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분유는 왜 탈 때마다 묽거나 되직하기만 하고, 이유식들은 왜 하나같이 멀겋기만 한 건지 알기 힘들었다. 이날 때 아이들이 그렇게 아파한다거나, 아이들이 꾸는 꿈은 실제와 같은 총천연이어서 밤에 소리를 악악 지른다는 것은 알 리가 없었다.
집안일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가사 시간에 신발주머니 이후, 바느질은 해본 적이 없다.(그것마저도 엄마가 해줬다!) 고등학교 때 십자수가 유행할 때도, 책상 서랍 속 큐브를 돌리던 나였다. 바느질뿐이던가. 된장찌개는 쓰기만 하고, 콩나물국의 콩나물들은 다들 말라비틀어지게 끓였다. 옷장의 옷들은 잊지 않고 때가 되면 곰팡이를 잘도 키웠고, 전기포트 씻는다며 세제를 넣고 물을 끓여 포트의 생을 마감시켰다. (폭발했다면 이런 글 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육아와 집안일 어느 한 구석 똑똑하고 똘똘한 모양을 갖추지 못했다.
생활은 더하다. 기자 준비하면서 그렇게나 환율 변동과 금리와 주식과 부동산 용어에 대해 공부하고 외웠지만, 정작 매매 계약서는 남편이 다 작성했다. 뒤에서 아이를 안고 아무리 들어 봐도 들리는 건 '은, 는, 이, 가' 뿐이었다. 아이를 안고 화장실에 가서 기저귀 갈고 오면 계약은 끝나 있었다. 당장 일주일 전, 어제만 해도 그렇다. 하수구가 막히면 어찌할 바 모르고, 전구는 깜빡거려도 '왜 저러지' 하고 멀뚱거릴 뿐이다. 뭐 하나 제대로 알고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모든 결정과 실행은 남편의 몫이었고, 나는 그 옆에서 아이들을 안고 난감한 얼굴을 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헛똑똑을 넘어 멍청한 수준이었으나, 그마저도 '그렇구나, 좀 그렇긴 하지' 하며 받아들였다.
어느 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뚜껑 위에 올릴 걸 찾다가 석사 논문에 손이 갔다. 아, 내가 이 순간을 위해 논문을 썼구나. 찰떡이었다. 그뿐인가, 냄비 받침대로도 제격이다. 그렇게 잘 사용하다 문득 열어 보고는, 가슴 벅찬 자기 멸시와 증오를 느꼈다. 내가 이러려고 석사를 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논문 마치고 초반에는, 주제가 한국에서는 많이 쓰지 않는 주제라 생각보다 인용이 많이 되는 것 같아 뿌듯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 후 나의 석사논문은 컵라면 덮개와 냄비 받침대로 전락하다가 지금은 인테리어용이 되었다.(책꽂이에서 검은색을 담당하고 있어 인테리어로도 좋지 못하다) 박제된 나의 똑똑함, 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이렇게나 멍청하고 칠칠맞지 못한 엄마와 아내가 되려고 그렇게나 부지런히 똑똑했던가. 생활의 모든 면에서 단 하나도 똑똑하지 못한, 뉴런 구석구석 '헛똑똑'만 가득 찬 지금의 나에게 그 시절의 똑똑함은 도대체 무어이던가. 10년전까지만 해도 내 자부심의 근원이었던 '똑똑함'은 지금의 나에게 허(虛)와 무(無)로 증발해버렸다.
현실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형이상학, 외국어, 글쓰기, 독서, 공상. 좋아하는 것만 봐도, 굶어 죽기 딱 좋은 사람이다. 밥이나 축내고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밥을 축내는 건 잘하는 것 같다)
이런 나를 매 순간 일깨워주는자들이 있다. 역시나, 아이들이다. 자는 아이들을 보면, 나의 부족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게 된다. 늘 그렇듯, 나는 헛똑똑 한 사람이라 고민은 고민으로 끝난다. 한 가지 명확해지는 건, 아이들 앞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많다는 거다. 똑똑한 엄마보다는, 지혜로운 엄마이고 싶다.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에는 똑똑한 엄마가 똑똑한 아이를 키운다는 이데올로기가 한반도의 절반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사상임을 이제는 누구나 안다. 그래서 더 어려워졌다, 똑똑에서 지혜로움으로의 레벨업이. 아이들과 연관된 모든 판단에 앞서, 나의 일천한 지식과 깜냥으로 함부로 속단하는 결정이 아닌, 상황과 과정을 전체적으로 우러러볼 수 있는 통찰과 지혜를 갖고 싶다.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수준의 단어들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글을 쓴다. 바야흐로 기성전'글'이다. '이성'으로 포장된 알량한 지식과 세속의 것들을 비워 내고, 그 자리의 바닥을 조금 더 낮춰 넓은 마음을 갖고 싶다. 넓어진 마음이 내 머릿속 이기(利己)와 삿된 욕망을 다 받아들이고 희석시키길 바란다. 마음의 찌든 것들을 비워내는 행위가, 나에게는 바로 글쓰기이다.
물론 글을 써서 지혜로워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글로 마음의 것들을 드러내고 말려 놓으면, 마음의 공간에 바람이 들고 향기로워진다. 이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의 곳곳에 숨어있는 지혜를 찾아내고 내 것으로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밤에도, 끊임없이 '엄마'를 불러대는 아기를 재우기를 반복하며 돈도 안 되는 글을 쓰는 것이다.
똑똑했던 과거를 지나 헛똑똑한 지금의 내가 미래를 가득 채울 지혜를 얻기 위해.
* 손들고 질문하기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때는 꼭 손을 들고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질문을 했다. 저학년 때는 그래도 곧잘 대답해 주셨으나, 고학년이 될수록 '질문은 수업 끝나고'나, '지금 말고 좀 있다' 또는 '수업시간 중에는 질문하는 것 아니다'는 식의 대답을 들었다. 반면 대학교나 대학원 때는, 그저 교수님 말씀 중에도 질문이 가능했다. 교수님들은 기꺼이 하시던 말씀을 멈추고 질문을 듣고 답하시고 토론했다.
외국의 영화를 보아도,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꼭 우리의 대학생들처럼 질문한다. 간단히 손바닥 보이는 정도의 제스처를 하거나, '익스큐즈미' 하고는 바로 질문한다.
교육 현장에서의 질문의 문화에 대해 꽤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볼라 치면 친구들은 '뭐래, 점심 뭐 먹을래'라고 물어 왔다. 나는 '명동칼국수'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질문에 대한 질문은 지금껏 어디도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