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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an 12. 2021

생강을 생각하다

'쓴' 맛에 대해 쓰다

   아이씨, 하고는 입 안의 모든 것을 뱉어내 버린다. 생강을 씹었다. 생강을 씹으면 늘 입 안의 모든 것을 뱉어버렸다. 생강 맛이 입 안 가득하면 어떤 맛도 다 싫어졌다. 아 제발 좀, 생강을 먼지처럼 갈아버리던가 넣지 마라고. 이런 생각을 했지만, 말로 표현한 적은 없다. 필요하니 넣었겠지 싶으면서도 너무나도 싫었다.

   쓴 맛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다. '쓰다'라는 맛은 도대체 왜 있는 걸까, 를 늘 생각했다. 맛있는 것만 먹어도 부족한 인생, 굳이 쓴 맛까지 봐야 하냔 말이단 말이다. 결혼하고 본격적으로 음식을 해보았는데, 레시피를 검색할 때마다 '생강'은 무조건 프리패스였다. 6년간 생강을 사본 적이 없었다. 생강이 들어가는 레시피는 마늘을 좀 더 많이 넣었다. 생강이나 마늘이 똑같은 향신료인데, 생강은 쓰기만 하고 마늘은 달아지기도 하니까, 무조건 마늘! 마늘 가득 음식들은 꽤 훌륭했다. 생강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신혼 때, 남편과 급 떠난 통영 여행. 3월의 통영에선 무얼 먹어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통영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다리쑥국'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3박 4일 내내 도다리쑥국은 먹지 않고 그냥 왔다. '쑥'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아, 이 곳까지 와서 굳이 쑥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을 거부하지 못하고 사시사철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회덮밥만 먹고 왔다. 커피는 또 어떤가. 커피 없인 못 살지만, 아메리카노는 절대 먹지 않는다. 나의 취향을 모르는 이가 사주었다면 어쩔 수 없이 한 두 모금만 마시고는, 버린다. 아깝지도 않다. 커피 본연의 존재 이유인 '쓴 맛' 때문이다. 커피는 달아야 커피지,를 외치며 늘 바닐라 라테나 헤이즐넛, 캐러멜 마키아또만 상대한다. 거기에 시럽 펌핑 두 번은 기본이다. 인생은 달아야 한다, 라는 나의 무의식적인 인생론이 커피에 투영되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고진(苦盡) 따위는 내게 없다. 무조건 감래(甘來) 뿐이다. 고진을 겪고 느끼기엔 인생은 너무 짧고 허망하다. 감래로 가득 찬 인생만이 의미 있고 가치 있을 뿐이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1년 살이를 하면서, 음식 하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생강이 생각보다 많이 사용되었다. 갈비찜, 생선조림 같은 각종 고기와 생선 요리에는 기본이었고, 김장에도 필수였다. 뭐, 레시피에서 봤으니 이해도 됐다. 손질된 생강도 있었으나, 옛날분 답게 날 것의 생강을 사서 집에서 다듬었다. 다듬는 일은 며느리의 몫이었는데, 생긴 것도 별로고 향은 진짜 극혐이었다. 아가야, 제발 울어줘, 를 기도하다가 아기가 징징대고 엄마를 찾으면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생강은 내버려두고 갑자기 모성애가 폭발하는 엄마로 변신한다. 생강 손질을 마무리하신 어머님은, 내가 안 볼 때 여기저기 잘도 넣으셨다. 빻고 찧고 썰어서 여러 형태로 둔갑시키셔서 말이다. 그 생강들이 톡(그렇다, 생강은 입 안에서 정말 톡 씹히는 것이다) 씹힐 때마다, 시어머니 앞이라서 억지로 겨우 씹어 삼켰다. 큰 생강을 씹을 때면 화장실 가는 척하고 변기에 뱉어버렸다. 아 진짜, 왜 이러시는 거야. 하지만, 생강을 씹을 때 빼고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어쩜 이런 맛이 나지, 어머님 진짜 최고예요! 를 외치며 매 식사마다 감탄했다. 옆에서 지켜봐도 별 것 없는 간단한 레시피인데, 먹어 보면 하나같이 제대로 된 맛이었다. 내가 뱉어낸 그것들이 그 맛을 내게 한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막내 예방접종으로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하고 나니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가까운 친구에게 연락했더니 선뜻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언니 카레 어때요, 라는 말에 싫어,라고 진심으로 대답하고 싶었다. 조금 고민하고 나서 먹어보지 뭐,라고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카레는 언제나 내키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에 거의 매주 먹기도 하고, 원래 그리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었다. 카레를 먹을거면 굳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음식에 남다른 입맛을 보유한 친구라 일단 먹어보기로 했다.


   이건 뭐지, 이 세상에 이런 카레도 있었나, 이건 카레가 아니야, 이건 요리고 작품이야, 지금까지 이 맛도 모르고 살아왔다니 헛살았어. 친구가 내놓은 것은 저 세상 음식이었다. '토마토치킨커리'라고 했다. 음, 그렇지, 커리라고 했어야지, 카레라고 해서 내가 매일 먹는 오ㄸㄱ카레인 줄 알았잖아.

   

   언니, 이거 그 카레 맞아요.

   

   그 충격은 감히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거니, 시판 토마토소스와 닭다리살과 양파와 내가 아는 그 카레로 했단다. 오븐에 졸이듯이 하는 게 비법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맛의 혁명이었다. 수다 떨 기분이 아니었다. 마침 아이도 자주어서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해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다시 한 번 레시피를 물었다. 그냥 양파랑 버터랑 토마토랑 어쩌고저쩌고 하고 생강 좀 넣고..... 뭐? 뭐라고? 생강? 네, 생강요. 카레에 생강을?

음... 안 넣어도 되긴 하는데요, 생강을 넣어야 특유의 맛이 살아나고 맛있어져요.

친구가 해 준 토마토치킨커리.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맛있음. 훨씬 맛있음. 참 맛있음. 매우 맛있음. 정말 맛있음. 완전 맛있음. 아주 맛있음. 최고 맛있음. 그냥 맛있음.






   40년을 가까이 살아오면서 가졌던, 음식에 대한 나만의 세상이 생강의 쓰나미에 휩쓸리고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터전이 다시 만들어졌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먹어보니, 생강의 쌉싸름이 혀에서 겉돌고 있었다. 많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맛이었다. 그 맛을 빼고는, 이 맛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의 맛, 생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맛뿐만이 아니다. 입에 쓴 것이 몸에는 좋다더니, 그것이 바로 생강이었다. 감기나 복통, 설사에 생강차 한 잔 하시면 금방 좋아진다. 소화가 안 될 때, 혈액 순환이 안 되고 몸이 붓거나 다이어트가 필요할 때도 생강은 그 효험(?!)을 발휘해 왔다.


   산다는 것 역시 그러했다. 밥을 먹다가 작은 생강을 톡톡 씹거나 큰 생강을 콱 씹게 되는 것처럼, 살다가 작은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도 있고 커다란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 때도 있다. 쉽지 않은 시간들이고 시련의 나날을 겪게 되지만, 어쨌든 지나오게 된다. 고난의 정도와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는 늘 그 시간들을 뒤로 하게 되게 되는 순간들을 맞이한다. 생강의 맛을 뒤돌아보게 되는 지점에서 보면, 생강이 내어준 깊은 맛과 향이 삶의 여기저기 퍼져 있음을 알게 된다.  

   생生의 나날을 지나온다는 것은 생강生薑을 맛보는 시간이 쌓이는 것과 같다. 그런 시간들이 있기에, 그런 시간들을 지나오기에 우리 삶은 전체적으로 의미가 있게 되고 더 가치 있게 된다. 그저 부드럽기만 하고 달달한 시간만 계속된다면, 짧지 않은 인생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곱씹을만한 나날이 없는 인생, 그것에서 우리가 건져낼 만한 것이 있을까. 생강처럼 톡 또는 콱 씹혀줘야, 고통과 어려움 같은 것들이 우리의 일상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나 줘야 우리는 배울 수 있게 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커다란 생강 덩어리를 씹어 쓴 맛을 오래 머금어 봐야, 지난하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역경이나 시련의 시간을 지나 봐야 '경험'이나 '연륜'같은 것들을 쌓을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지혜'나 '슬기로움' 또는 그런 비슷한 것을 갖추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생강이 들어간 커리를 먹다가 '인생엔 생강이 있어야 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커리의 맛을 생강이 결정한 것처럼, 생강이 있는 인생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생일 수 있어. 창으로 길게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며 아직 입 안에 가득한 커리의 맛을 느끼며 친구에게 말했다.

"생강으로 글을 쓰고 싶어 졌어. 제목은 '생강을 생각하다'야."






   요즈음 매일 아침 생강을 먹는다. 애셋 낳고 불어난 살과 임신 진행형 상태인 배를 보고 친정엄마가 생강 발효액을 갖고 오셨다. 공복에 따뜻한 물로 한 컵 가득 마시란다. 코를 막고 인상 잔뜩 찌푸리고 숨을 쉬지 않고 마셔야 겨우 마실 수 있는 맛이지만, 꽤 효과가 있는 듯하다. 운동 없는 일상인데도, 배와 허벅지 지방들이 꽤나 몰랑몰랑해졌다. 나 지금 열심히 분해되고 있는 중이야,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 아침마다 아기 기저귀 갈고 생강차부터 마신다. 본격적인 아침은 그 후에 시작된다.

   좀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생강을 생각해 보게 되어 참 다행이다. 앞으로는 음식에도, 매일 다가오는 '쓴 맛'나는 것들에도 생강을 잊지 않을 것이다. 좌절, 시련, 고통 이런 것들을 톡 혹은 콱 깨물고 꿀꺽 삼켜버릴 것이다. 생강이 품고 있는 힘, 생강 뒤에 오는 맛을 늘 떠올릴 것이다. 그 힘과 맛을 바탕으로 몸이 좀 더 건강하고 맘이 좀 더 깊은 사람이 될 것이다.  


 

생강과 사랑 잔뜩 썰어 넣은, 먹어도 먹어도 적응되지 않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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