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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22. 2020

관성을 이겨내려면

관성을 이겨내려는 노력 자체가 관성이 되어야 한다

   유튜브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여기저기 이끌려 다니다가, 문득 한 광고에 멈췄다. 숙박 어플 광고였는데, 지금까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폴 킴'이라는 가수를 내세워 그저 노래 한 곡 부르는 게 다였다.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도 아름다웠지만, 그의 목소리가 뿜어내는 노래에 한동안 멈췄던 '설렘'의 박동이 일었다. 광고를 보고는 광고를 보기 위해 유튜브를 검색한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은 그의 모든 노래를 매일 귀에 달고 지내고 있다. 육아전쟁에서 나를 건져내 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줬으니, 폴에게 노벨평화상을 줘야 해. 아, 민샤평화상인가. 그럼 너무 권위 없는데. 어쨌든 여름 산속 피톤치트도 품고 있으면서 겨울 입김 서린 따스함을 다 갖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 푹 빠져있는 나날이다. 


아줌마 연애하고 싶게 만드는 영상과 목소리의 광고



   생각해 보니, 새로운 노래를 마지막으로 다운로드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작년 여름 아이유의 청량함에 빠져 한동안 듣고는 처음이다. 아이유 전에는.. 결혼하기 이전으로 시간의 테이프를 감아야 했다. 그러니까 내 플레이 목록에는, 8090 노래들과 0809년 대만에 있을 때 한창 들었던 대만 대중가요들(왕리홍과 주걸륜과 기타 등등), 좋아하는 제이팝 몇 곡, 디즈니 클래식 그리고 아이들용 뿐이다. 새로울 것이 없는, 제목에서 낡은 티가 퍽퍽 나는 노래들 뿐이다. 


   새로움을 찾는 것, 그 것을 위해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것 그것에는 꽤 많은 힘이 필요했다. 유난히도 무거운 엉덩이를 가진 탓이기도 하지만, 관성을 이겨낸다는 것은 본래 큰 에너지를 일으켜야 하는 일이다. 관성(慣性),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처음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 하는 성질이다.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관성도 큰 법이다.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지 않은 지 어언 6,7년이 다 되어간다. 이 버릇은 그 세월만큼 꽤 묵직해졌다. 새로운 음악, 요즈음 음악을 다 '가벼워', '들을 것이 못 돼'라고 치부하며 무시한 마음이 어느새 편견이 되어 꽤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 힘을 이겨내고 들어 본 폴 킴의 음악은, 나의 뇌와 귀와 마음의 어느 부분을 쓸어주고 있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들을 닦아내고 신선한 바람이 통하도록 해주었다. 검색해 보니 그는 '음원 강자', '음원 장기집권' 같은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아, 요즘 사람들은 이런 음악을 듣는구나. 나는 왜 묵직한 세월에 눌려 이런 음악을 듣지 못하고 지냈을까. 어쩌다 이런 음악을 그렇게 쉽게 놓치며 지내고 있었을까. 다 관성 때문이었다. 예전 것만 듣고 예전 것만 좋다고 여기고 예전 것에서만 '나다움'을 찾으려는, 고집을 닮은 어떤 힘 때문이었다. 서른셋 청년의 노래를 듣다가, 나의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게 하는 관성을 깨달은 것이다. 




   시어머니가 주말 동안 오셔서 해주신 김밥을 아침에 먹고 체했다. 아기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더욱 아프다. 결국엔 다 게워내고 더 게워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마저 게워냈다. 화장실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누워있는데, 막내가 화장실 변기에 손을 넣으려 해서 간신히 일어났다. 남은 힘을 다해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어린이집에 전화해서 아이들 하원을 한 시간만 미룬다고 했다. 

   "어머님,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티를 내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누가 들어도 죽기 직전 목소리였을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난 시간에도 토를 하고 있어서 어린이집 전화를 받지 못했다. 겨우 일어나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선생님들은 관리실에 나의 상황을 말하려고 했다고 한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무슨 일이라도 난 건 아닌가 싶었던 게다. 

  아이들이 집에 오고 나서는 아파하고 있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가 사주신 장난감까지 택배로 와서 아이들의 텐션은 최고조였다. 장난감을 열고 조립하고 건전지를 넣는 데 집중했다. 치우고 아이들 밥을 차리는 동안은 그의 음악을 들었다. 어느 순간 나는 아프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픈 것을 잊은 것'이다. 아픈 것을 잊고 지내니, 아프지 않게 되었다. 아프지 않은 몸으로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빨래를 개고 정리하고 재우고 글까지 쓰고 있다. 

   나는 늘 그랬다. 잘 체하는 체질인데, 체할 때마다 누워서 '아이고, 아이고야'만 했다. 아파하기만 하는 힘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벗어날 생각도 없이, 그저 아파하기만 했다. 약을 먹고 일어나 뛰어 보고 손을 주 무러 볼 노력도 않고 그저 아파하기만 한다.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면서. 나의 이런 관성은 유난히 힘이 셌다.    


   관성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역시나 '육아'이다. 늘 나의 육아는 힘겹고 고통스러웠으며 피곤했다. 그 누구도 나의 고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나 이렇게 힘든데, 제발 나 힘든 것 좀 알아채 줘. 나 좀 봐줘. 누가 내 손 좀 잡아 주고 보듬어줘. 고생하고 있다고 제발 말 좀 해 줘. 누가 옆에 좀 있어 줘. 나 좀 도와줘. 매일같이 나도 모르게, 또는 의식적으로 되뇐 말들이다. 자연스레 서러움과 눈물도 같이 솟아 나왔다. 애셋 육아의 절벽 끝에 간신히 서서, 여기서 조금만 더 힘들어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감정과 느낌이 매일 덮쳤다. 조금 괜찮은 날은 그 절벽에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까마득한 절벽 밑의 어둠이 뿜어내는 컴컴함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지냈다. 이 컴컴한 절벽을 등지고 뛰어나올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저 절벽을 바라보며 떨어지는 상상만 하며 내가 나를 우울하게 했다. 누가 알아준다고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며 기껏해야 위로 정도만 받을 뿐 변할 것 아무것도 없는데, 허공에다가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했다. 외부의 힘이 가해질 것 없는 나의 일상은,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려는 관성의 법칙을 따르려고만 했다. 그 질량은 세월만큼 무겁고 단단해져서 관성의 힘도 커지기만 하고 있었다. 우울해할 시간에 일어나 뜀박질이라도 하고 잘 챙겨 먹고 억지로라도 웃어야 했다.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거북목 교정 체조를 하며 뱃살과 두통과 이명을 물리쳐야 했다. 계란 풀은 라면보다는 계란 프라이 얹고 나물들 얹어 비빔밥을 먹었어야 했다. 관성보다 더 큰 힘을 내 안에서 일으켜 관성을 이겨내야 했다. 외부의 자극이라곤 주어질 수 없는 환경이니, 내가 나 스스로의 자극이 되어야 한다. 내 앞에 드러누워있는 육아와 일상을 일으켜 세우는 힘은, 어디서도 아니고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서른셋의 부드러운 음성을 지닌 가수가 느닷없이 알려 주었다. 관성을 이겨내려면, 관성을 이겨내려는 노력 자체가 삶의 관성(慣性)이 되어야 함을.



 


그런 밤이 있습니다. 글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밤.

오늘이 그런 밤이었습니다. 잠들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물론 그의 음악과 함께요.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 유난히 글만이 저를 괴롭힙니다. 머릿속의 이야기를, 그 단어들을 풀어내. 

결국엔 졌습니다. 늘 지고 맙니다. 지고 나서 개운한 기분으로 나의 글을 써내면, 그제야 푹 잘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동면에 들겠다는 어설픈 각오를 깨버리게 되었어요, 역시나 타고난 변덕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이들은 긴급 보육을 보냅니다. 등하원 시간을 단축했어요.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좀 더 나에게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아, 여러분이 주신 100원 소중히 받았습니다. 부자가 되어서인지, 나의 미련하고 게으른 관성을 이겨낼 힘도 생긴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끄적였습니다. 


https://brunch.co.kr/@1kmhkmh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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