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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18. 2021

그들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내 인생에 강렬한 기억을 심어준 그들

#1

  중2, 열네 살 때였어. 소영이는 반장이었고, 나는 부반장이었어. 그냥 뭐, 그때는 대부분 공부 잘하는 애들이 반장 부반장 하고 그랬어. 소영이는 진짜 공부만 하는 초초초모범생이었어. 고작 중2였는데, 시험기간엔 아침마다 청심환을 먹고, 시험시간에 코피가 나고, 시험이 다 끝나면 손이 벌벌 떨려서 두 손을 잡고 있는 그런 아이였지. 좀 유별나긴 했었어. 그에 반해 나는 체육시간 좋아하고 수업 시간에 '쎄씨'도 돌려가며 보고 임창정이나 김민종 사진 있으면 구걸도 하는 부반장이었어. 

  기말고사에서, 아직도 선명히 기억해, 나는 도덕 100점이었어. 너무 쉬웠어. 당연히 100점 확신하고 문제지와 제출했던 답지를 비교하는데, 어라? 24번 답 나는 분명 정답 1번으로 문제지에 체크했는데, 답지에는 '4'로 써져 있는 거야. 96점.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1'이라고 썼거든. 내가 잘못 쓸리 없었어. 명백하게 1번이 답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너무나도 이상해서 자세히 봤더니, 글쎄 4자에 'ㄴ'이, 아주 미세하게 샤프심 색깔이 다른 거야. 그러니까, 나는 '1'로 썼는데 누군가 거기에 'ㄴ'을 더해서 4를 만든 거지. 나를 96점으로 만들려던 누군가의 수작이었던 거야. 나는 흥분해서 수업시간에 막 큰소리로 말했어. 

  "선생님, 누가 제 답지에 일부러 써서 오답으로 만들어 놨어요. 이것 보세요!"

  교실은 일순간 수군거렸고, 선생님이 와서 자세히 보더니 정말이라며 누구냐고 그랬어. 당장 범인 나오라고 했지만 조용했어. 10분간 다들 눈 감고 책상 위에 앉았지만 범인은 나오지 않았어. 선생님이 '다른 반 다 뒤져볼 테니까 기다려'라고 했지만, 하교시간까지 범인 색출은 실패했어. 너무나도 억울해서 엉엉 울고, 집 오면서도 울고 엄마 아빠한테 이야기하면서도 엄청 울었어. 밤 8시쯤 전화 한 통이 왔는데, 엄마가 네, 네, 네, 하더니 끊고는 하는 말이, 학교에서 너 100점 처리해 주겠다고 하더라, 하시는 거야. 또 엄청 울었어. 아, 하늘은 진실을 알고 계시는구나, 하면서 말이지. 

  밤 9시가 넘어서 문이 똑똑, 하더니, 모르는 아줌마 아저씨가 서 있는 거야. 그 뒤로, 소영이가 있었어. 소영이 엄마 아빠는 매우 죄송하다며, 자식을 잘못 키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엄마 아빠에게 계속 고개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했어. 그 옆에 소영이는 그저 고개 숙이고 있었어. 소영이 아빠가 '미안하다고 말해' 해서 소영이가 고개 숙인 채로 '미안해'라고 했지. 나는 가만있었어. 아빠가 시키기 전에 소영이가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빠가 시키니 말하는 게 좀 고까웠어. 아빠가 대답해 주라길래 마지못해 '괜찮아'라고 대답했어. 아주 괜찮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부모님까지 오셔서 그렇게 하니 억울함은 풀리는 기분이었어. 그 기말고사는 내가 1등을 했어.

  중3 때는 다른 반이 되었고, 그 아이는 춘천여고로 '유학'을 갔어. 강원도 산골에서 '춘여고'나 '강여고(강릉여고)'로 유학가는 것은 사실상 우리와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발판을 다진다는 의미였어. 나는 그 아이보다 시험을 잘 본 적이 있었지만, 시골 여고로 진학했지. 그리고는, 대학 졸업하고 일하다가 애셋 엄마가 되었어. 매우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 소영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잘 살고 있을까?



#2

  대학교 입학 전, 일명 오리엔테이션을 갔어. 재수를 하겠다고 수능 한 달 전부터 땡땡거리며 놀고 잠만 잤는데, 수능 망치고 오니 엄마 아빠가 재수시켜줄 돈이 없다고 하셨어. 점수 맞춰 대충 간 대학이라 너무나도 싫었어. 하지만 별 수 없었지, 입학은 했고 오티는 가야 할 거 같아서 갔지.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중에, 버스에서 옆에 탄 아이는 말이 없어 더욱 난감했어. 다들 꽤나 익숙해지는 것 같았는데, 그 아이는 너무나도 말이 없어 나만 친구를 만들지 못했어. 속으로 '말을 못 하는 아이인가, 우리는 어학 전공인데 말을 못 할 리가 없을 텐데' 생각하며 도착했어.

  어쨌든 옆에 앉았으니 밥도 같이 먹고 게임도 같이 하고 저녁 술자리에도 옆에 앉았지. 너무 말이 없어서 이름도 몰랐어. 이미 많이 친해진 친구들이 부러웠어. 갑자기 그 아이가 전화를 받으러 밖에 다녀오더니 문을 열고는 술자리 대강당을 향해 소리 질렀어.

  "저 연대 추가합격됐대요. 연대 추가합격이요! 저 지금 거기 오티 가야 해서 엄마 아빠 오고 있대요. 다들 안녕히 계세요!"

  하고는 빠르게 문을 닫고 나갔어. 말을 그렇게 잘하는 아이인지 처음 알았어.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연대 추가 합격을 기다리려고 그렇게 하루 종일 침묵했구나 생각하니, 기가 막혔어. 나는 종일 '연대 추가합격생'의 기분과 눈치를 살핀 아이로 전락했어. 내 옆의 한 해 선배 언니는 '저런 미친 ㄴ이 다 있어' 하면서 소주를 병으로 마셨어. 나도 잔에 있던 소주를 콱 들이켰다가, 20분 후 화장실에서 그대로 토해냈어. 

  연대 추가 합격한 그 아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잘 살고 있을까?



#3

  우리 부부의 신혼여행지는 괌이었어. 3박 5일. 괌으로 향하는 밤 비행기에서 우리 대각선으로 앉은 그 부부도 우리처럼 식을 올린 지 얼마 안 되어 보였어. 괌에서 함께 내렸고, 다른 호텔의 픽업 버스를 탄 것으로 기억해. 우리는 신혼이었으니, 당연히 즐거운 시간만 꽉꽉 채우고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날 괌 공항으로 갔지. 어라, 그 부부야. 다시 보니 괜히 반갑더라구. 그런데, 표정이 많이 안 좋아. 어쩌다 출국장 가까운 자리에서 대기하게 되어 대화를 엿듣게 되었어. 시댁 선물만 사고 친정선물을 안 사서 화가 엄청 난 신부가 계속 따졌고, 신랑은 돈이 없는데 어떡하냐며 맞받아쳤어. '이럴 거면 이혼해'라는 신부의 말에 '누가 못할 줄 아나'라고 신랑이 더 큰 소리로 대답했어. 어떡해 어떡해, 신혼여행에서 이혼하는 건가, 어떡해. 그러는데 탑승 방송이 나왔어. 그 부부는 각자 떨어져 비행기 자리에 앉았어. 밤 비행이었어서 인천공항에서 내릴 때는 비몽사몽이었어서 그 부부의 행방은 더 이상 알 수가 없어. 

  그 부부, 정말 이혼했을까? 만약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친 이들이나 사건은 아니다. 그저 미미한, 그래서 오히려 사소한 기억 정도로 남은 에피소드들이다. 

  

  그런데 정말 가아끔 그들 생각이 난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삶이 이렇게 흘러가도 될까라고 생각되는 순간, 지금의 생활과 삶의 방향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고 의문만 커져 갈 때 이들이 문득 떠오른다. 


  오로지 공부만 생각하며 다른 모든 것은 무시하던 아이, 체육시간에 운동장 한 바퀴도 제대로 뛰지 못하던 아이, 체육복 뒷주머니에 단어장을 끼우고 달리기 하던 아이,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관심도 갖지 않고 쉬는 시간에도 책만 보던 아이,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직장을 다니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 무엇보다, 14살의 그 아이가 행한 일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을지, 사고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는지 그것이 가장 궁금하긴 하다. 왜냐하면, 다음 날 그 아이는 여전히 아침부터 수학문제지만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2학기에도 변함없이 한 문제 틀려서 쉬는 시간 내내 울고불고했기 때문에, 나는 그 아이가사고의 전환점을 갖는 계기를 가졌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그 아이의 지금이 궁금하다. 지금까지의 삶의 과정이 과연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지, 그 과정이 생각만큼 순탄했을지 알고 싶다.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조금 더 높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기우인 걸까.

  오티의 그 친구도 그랬다. 피부가 하얀 편이었던 그 친구는, 자기소개를 시켜도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선배들이 억지로라도 시키려 하면 나갔다 한참을 들어왔다. 속으로 얼마나 현장의 모두를 비웃고 있었을까. 동시에 그 현장에 자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혐오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마침내는 승리하여 떠났다. 현장에 있던 모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일순간 철저한 패배자가 되었다. 단 한 사람, 내 옆의 선배만이 '연대 간 미친 ㄴ'의 존재를 재인식시켜 주었다. 그 아이가 남긴 패배감은 실로 커서 한 학기 내내 나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 아이와 나는 오티 때 함께했지만, 그 아이가 거니는 캠퍼스와 나의 캠퍼스는 많이 달랐다. 적응 못해서 망해라, 라는 유치한 저주도 많이 퍼부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조금 안쓰럽다. 그리고 부디, 그녀가 잘 적응해서 원하던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야 그녀에게 퍼부었던 나의 저주들이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괌의 신혼부부가 가장 걱정이다. 그들이 그런 사소한(그러나 사실 절대 사소하지 않은, 어쩌면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는) 문제로 이혼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그 상태로 이혼하지 않으면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은 확실했다. 가장 좋은 것은, 양가 부모님의 선물을 동등하게 사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비뚤어진 저울의 상태로 출국장까지 와 버렸고 비행기를 탔다. 그들에게 신혼여행과 돌아온 인천공항은 어땠을까. 그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하고 아이 낳고 오손도손 살고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이 괌으로 향할 때의 표정을 아직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 우리 부부는 도착하여 친정집으로 가서 친정엄마가 차려주신 밥 잘 먹고 좀 자고 신혼집으로 출발했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의 삶의 자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조금 좋은 방향으로. 그렇게까지 예민하지 않은 성격 덕분에 친구의 답지를 건드리는 기억 따위 없는 나의 학창 시절, 그렇게 깨끗하고 그만큼 순수해서 나는 잘 자랐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원하는 대학으로 입학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학교 타이틀'을 가지고 모두를 기만하고 무시하는 마음은 없었던 나의 그때를 칭찬하고 싶다. 오히려 그랬기에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 '너네 엄마 아빠' 이런 류의 분별심으로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힘들다는 것을 피부로 가르쳐 준 신혼부부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와 시어머니 사이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나는 위대하지는 않아도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의 온돌이 데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삶의 태도와 방향이 옳다는 확신을 갖고는, 조금 더 힘내서 빨래를 널고 기저귀를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삶에 대한 불확실한 의문들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불혹을 얼마 남기지 않은 인생의 시점에서 그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진심으로 지금의 그들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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