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의 봄, 타이완 사람들이 야구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나의 유학 생활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는 야구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MLB에 미쳐 밤을 지새운 날이 많았으나, MLB는 야구라기보다 인생이었고 예술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작은 섬나라가 즐겨하는 공놀이 따위 관심 가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섬나라가 즐기는 작은 공은,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내 마음의 한 지점을 건드렸다. WBC,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열리자 타이완 친구들은 보란 듯이 타이완과 일본을 응원했다. 자국 응원은 당연했지만, 일본 응원은 내게 매우 거슬렸다. 일본과 한국의 경기가 있는 날은 온 기숙사가 밝았다. 그러나 일본은 참패했다. 김광현이라는 젊은 투수는 겁 없이 광속 직구를 던졌고, 일본의 국가 대표 타자들은 그 자리에서 배트를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삼진을 당했다. 내 안의 천대받던 애국심이 자존감을 갖기 시작했다. 매일 WBC에 열광하며 모든 경기를 섭렵했고, 타이완 친구들 사이에서 괜히 어깨에 힘을 주고 걸었다. 몇몇 친구들과는 치기 어린 논쟁도 있었으나, 한국팀의 경기력에 대해 논하다 보면 그들은 늘 분노 섞인 인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해 WBC는 한국이 우승했고, 그 중심에는 김광현 선수가 있었다.
국가대표 좌완 투수 김광현, 출처 MK 스포츠
그 해 여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친구를 따라 야구장을 갔다. 야구에 흥미가 붙기 시작할 때였다. 친구는 SK 와이번스의 팬이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그 날은, SK 간판 투수 김광현 선수의 등판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거의 2년 동안 매 주말 인천행 지하철에 올랐다. 빨간 유니폼을 입은 팬들은 ‘문학경기장’ 역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곳에서 이미 함성은 시작되었다.
집처럼 드나들었던 문학경기장역, 출처 문학경기장 블로그
경기 3시간 전부터 자리 잡고 앉아 피자를 먹으며 몸을 푸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것은 ‘찐팬’의 행복 중 하나였다. 시타 시구가 끝나고 첫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세 시간은, 야구와 나의 '물아일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거대한 응원과 더 거대한 함성, 그 열기에 화답하는 야구공의 포물선은 외야석이나 경기장 밖으로 이어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 압도적인 환호는 순전히 우리 팀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문학구장에서 김광현 선수도 보았고, 삼중살과 21 득점(12 홈런 포함)도 보았으며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도 보았다. 어버이날 아빠와 함께 한 문학에서 삼중살을, 유난히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엄마와 함께 간 날 12 홈런을 보았다. 나 좋자고 엄마 아빠를 데려간 것이었지만,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닌 것들을 보게 돼서 괜히 효도한 기분이 들었다.
8회 말에는 ‘연안부두’가 문학구장을 가득 채웠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로 끝나는 노래에는 왠지 바다 내음이 실려 왔다. 노래와 짠 바다 바람은 구슬픈 듯 묘하게 선수들과 팬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이상형에 가까운 그 곁에는 연인이 있어 아쉬웠지만, 우리 팀의 승리는 그 아쉬움을 금방 날려 주었다. 대부분의 직관은 승리로 끝났다. 그렇다, 나는 직관 승리요정이었다. 홈팀의 승리로 끝나는 문학구장에는 늘 폭죽이 터졌다.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폭죽을 바라보며 내가 문학구장과 구도 인천의 팬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름다운 문학의 밤이에요. 출처 아빠곰 님 블로그
주말에 폭발한 열기는 월요일의 출근과 무경기로 식혔다. 나에게 휴일은 야구가 없는 월요일이었다. 아, 다시 생각해 보니 휴일은 없었다. 월요일은 지난 일주일 경기를 돌아보며 잘한 점과 못한 점을 되짚었다. 온갖 야구 전문 사이트에서 8개 구단 팬들과 논쟁을 펼쳤다. 특히 부산 아이들과는 '구도(球都)' 논쟁으로 현피?! 까지 뜰 뻔하기도 했다. 타 팀의 뛰어난 선수(예를 들어 류현진)의 공을 따로 감상하기도 했다. 화수목 3연전을 이어갈 팀의 최근 승률과 선수들 컨디션을 체크했다. 사무실 책상엔 우리 팀 감독의 명언 '일구이무(一球二無)'를 적어 붙여 놓기도 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야구광이었다. 나를 이런 야구광으로 만든 와이번스, SK 왕조는 나의 젊은 시절을 빛나게 해 주었다. 그렇게 나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인천 문학구장에 바쳤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친구 역시 함께 했다. 내 친구가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듯 나도 나의 꼬북이를 문학으로 이끌었다.(생긴 것이 꼬북이를 닮아 꼬북이다) 꼬북이의 첫 문학은 패배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보다 더 흥분하며 금방 슼(SK)으로 물들었다. 매일 퇴근 지하철에서 함께 DMB를 시청하며, 홈런이라도 치면 무언의 포효를 함께 했다. (문자메시지에는 대부분, 꺙아ㅏ아아아아아아아앙아 미쳤어 홈런 대박~~~~~~~~~, 같은 비문자의 형태가 가득했다)
당연히 문학경기장 행 인천지하철에도 같이 탔다. 우리는 레플리카(응원용 유니폼)를 살 여유가 없어, 온 가족이 빨간 레플리카를 입고 경기장에 들어서면 함께 부러워했다. 친구는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으면 저렇게 온 가족이 맞춰 입고 응원 나오고 싶다'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비혼주의자였으나, 그 순간만큼은 '슼린이'를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1루석 뙤약볕에서 피자를 뜯으며 우리는, 당시 썸 타는 남자나 소개팅 결과, 학자금 상황, 아빠의 병환이나 동생의 술주정 같은 이야기들을 주로 했다. 몸을 푸는 선수들을 보며 '컨디션 괜찮네~', '몸 제대로 안 풀다 좀 있다 병살 치려고 저러지~ 어?!' 같은, 아무도 몰라주는 코칭을 하곤 했다. 홈런이라도 치면 얼싸안고 기뻐하고, 파울볼이 오면 함께 피하고선 잡지 못해 아쉬워했다. 불꽃놀이를 볼 때엔, 서로 '제발 다음엔 우리 같이 오지 말고 남자랑 와서 보자꾸나' 해 놓고선 다음 경기 역시 어김없이 함께 했다. 꼬북이가 있어 나의 문학은 더욱 즐거웠고 감동으로 가득했다.
결혼 직전, 나의 팀은 갑작스레 감독을 경질하였고 나의 열정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결혼 준비를 핑계로 야구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결혼과 동시에 야구는 나의 일상에서 희미해졌다. 결혼 후 친구 집이 있는 청라지구를 방문하고 아이와 함께 송도 공원에 자주 놀러 갔으며 소래포구에서 건어물을 사 오곤 했지만, 나는 마치 전생처럼 문학구장을 잊었다. 그 사이 꼬북이도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가 아이를 낳았다. 세월은 성질이 고약하여 그 무엇도 '변함없게' 두지 않았다.
문학구장이 내 인생의 명확한 역사로 다시 다가온 건, 얼마 전 팀 매각 뉴스를 접한 후였다. SK는 신세계에 인수되었고, 댓글은 온통 ‘이마트 트레이더스’라는 조소로 가득 찼다.(정해진 팀명은 'SSG 랜더스'이다. 이전 팀은 슼SK이더니, 이번에는 쓱SSG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불현듯 문학의 뜨거움이 내 안에서 재점화되었다. 나의 청춘보다 푸르렀던 야구에의 열정, 그깟 공놀이가 뭐라고 공 하나에 울고 웃었던 9회 말, 상대팀 전력 분석까지 모두 마치고 임하던 한국 시리즈, 패배한 날이면 밤을 새워 패인을 논하던 온라인 팬 모임. 나의 찬란했던 팬심은 한국 야구의 과거에 한 줌 더 하는, 딱 그 정도 미미함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1루석의 함성, 치어 단장과 치어리더들의 열정, 이따금 앉은 외야 잔디석의 여유,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3루석으로부터의 응원가까지. 문학구장은 내게 그저 단순한 야구장이 아니다. 내 젊은 날 열정의 흔적이 그을음처럼 남은, 내 생의 아름다운 문학(文學)처럼 기억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