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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an 21. 2021

눈물의 뽀로로 소파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진한 눈물 쏟아내는 일들이 이따금씩 있다. 아이를 낳고는 눈물의 농도가 조금 더 진해지고 있는데, 4년 전 그 날의 눈물엔 유난히 불순물이 많았다. 결혼 전엔 생각도 못할, 뽀로로 소파 따위가 눈물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해를 넘겼으니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친구들 집에 가면 아기 소파에 잘 앉아있는 세 살 첫째 딸이었다. 사달라고 조르거나 떼쓰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맘에 들어하는 모습이었다. 맘 카페를 둘러보다 상태 좋은 뽀로로 소파를 보았다. 중고치고 싸진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버려서 어떻게든 사야만 했다. 그런데 난 늘, 현금 부족 상태이다. 가정 경제권이 남편에게 있기에 내 뜻대로 현금을 융통할 수 없다. 곁에 가면 소금 냄새가 나나 싶을 정도로 검소와 절약을 세상 최고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이라 아이 소파 따위는 사주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랬듯 도움을 청하려 친정엄마께 전화하니, 낮잠 중이신지 안 받으신다.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커져서 포기하려는 찰나, 친정 아빠가 생각났다.

  일부러는 아니고,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친정아빠는 첫째가 태어나고 그때까지 아빠 이름으로 선물 하나 해주지 않았다. 그런 센스는 태어날 때 할머니 배에 두고 태어난 게 분명하다. '첫 손녀 선물하나 안 사준 할아버지' 명분으로 사달라고 해야겠다 싶었다. 또 그렇게 물질적 선물 하나 없었던 것 치고, 거의 매일 아침 영상 통화하자고 나와 아기를 단잠에서 깨워댄 것에 대해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맘 카페의 판매자에게 연락해, 원래 가격이던 사만 원에서 오천 원 깎은 후 뿌듯한 마음으로 아빠한테 전화드렸다. 역시 손녀 사랑, 흔쾌히 사주신다 하신다. 물건 받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좀 무거웠지만, 기쁜 마음으로 1층에서 9층까지 들고 와서 아이방에 배치했다. 둘째 만삭의 몸이었지만 그런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들고 오는 동안 배가 뭉쳤지만 뭉친지도 몰랐다. 뿌듯한 마음으로 사진 찍어 친정 채팅방에 올렸다.      


  “아빠가 사줬어.”    

 

  이 한 마디에, 동생의 개인 톡이 반짝거린다. 맏이 같은 동생의 불호령이 천둥번개처럼 내려져 폰이 뜨거워진 것 같았다.     


  “누난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빠 이사 가시려면 돈 모아야 돼. 일도 매일 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 벌지도 못하시는 거 알면서. 누나 진짜 왜 그러냐. 누나가 크게 잘못했어. 아빠 천 원짜리 뻥튀기 하나도 못 사서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이야. 내가 집 갈 때마다 빵 사 가는 것도, 주전부리 좋아하는데 못 사는 아빠 드시라고 사가는 거야. 용돈을 드리지는 못할망정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아빠 저렇게 지내시는데. 누난 돈도 있고 집도 있잖아!”           

  

  남동생은 나와는 다르게 현실에 사는 사람이었다. 사회생활도 오래 했고, 한 가정의 가장이다. 내가 공상과 이상의 구름 속을 거닐 때 동생은 이성의 눈으로 현실의 차가운 땅을 걷는 사람이다. 엄마 아빠의 처지를 생각했을 때, 누나의 행동이 아무 생각 없는 아줌마의 그것으로 보인 것이다. 그도 그럴만하다. 엄마 아빠는 옥탑방 월세에서 생활하신다. 가파른 계단을 겨우 딛고 오르면, 3층의 판잣집 나의 친정집이 있다. 아빠는 일용직 용달 일을 한다. 엄마는 미용 강의를 나가는데, 두 분 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 두 분 생활만으로도 빠듯한 현실이다. 그런 친정이라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마 첫째가 말을 하고 예전 일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아이를 친정에 데리고 가지 않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처럼, 현금이 부족할 때 연락드리는 친정이었다.           


  동생에게 세게 혼나고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어제 먹고 남은 돈가스에서 짠맛이 났다. 돈가스가 축축했다. 돈가스를 덮은 건 소스가 아닌 내 눈물이었다. 내가 얼마나 철부지고 생각이 없고 엉망진창의 사람인가를 절절히 느껴야 했다. 배 속에서 잠을 자던 둘째가 깨어나 발로 툭툭 찼다. 엄마, 무어가 그리 서러워요, 심장소리가 슬퍼서 잠을 잘 수 없어요. 심한 태동을 느끼며, 아가 미안하다 하면서도 아이처럼 끅끅 울었다. 그깟 소파가 뭐라고 나는 아빠의 통장을 들쑤시고 동생의 부모에 대한 염려를 들쑤시고 내 배속의 아이의 성장을 들쑤신단 말인가.

  결국 아직 입금 안 해준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말씀드리고, 그 와중에도 이만 원만 입금해달라고 했다. 입금 안 해주셔도 돼요,라고 말하기엔 나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도, 못난 딸 티 내면서 굳이 이만 원은 달라고 했다. 다행히 통장에 만 오천 원은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보내주신 이만 원과 나의 만 오천 원을 합쳐 판매자에게 이체했다. 오천 원을 깎았던 뿌듯한 마음은 너덜너덜해진 채 통장 잔액 370원 옆에 활자화되었다. 뽀로로 소파 이체. 고작 삼만 오천 원짜리 손녀 선물 이야기했다가, 눈물 콧물 쏙 뺐다. 이렇게나 못난 딸이 또 있을까 싶었다.          





  장난감이 넘쳐나는 친구들 집에 가서, 도대체 이 많은 장난감을 무슨 돈으로 살까 싶어 물어보면 대부분 대답이 비슷했다. ‘이건 친정엄마, 이건 친정 아빠, 이것도 친정 엄마 아빠가 사준 거’로 시작되었다. 그 당시 나의 첫째 딸이 받은 장난감은, 어린이날 친정엄마한테 부탁한 레스토랑 세트가 다였다. 시어머니는 먼저 결혼한 시동생이 안겨드린 첫 손녀가 무조건 먼저셨다. 첫 손녀 때는 이백만 원 넘는 아기침대와 각종 장난감과 백화점 옷을 사 주셨지만, 나의 첫째 딸 어린이날은 은퇴하셨단 이유로 옷 한 벌 사주셨다.     

  나도 장난감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 당시 나를 포함한 주변의 아기 키우는 집 가운데 우리 집이 장난감이 가장 없었다. 어린이집에서 이것저것 가지고 놀고, 집에서는 약간의 결핍 상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장난감보다 엄마 눈 보며 살 부대끼며 노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주려 노력했다. 그래도 장난감이 너무 적다 싶었고, 크면서 자꾸 책 앞에 앉는 첫째가 예뻐 보였다. 함께 앉아 책 읽을 소파 하나를 싼 가격에 받아보려 했다가 된통 혼났다.      


  다시 기운 내 밥 먹다가 또다시 숟가락 놓고 엉엉 울었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동생 말이 다 맞아서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돈 없는 아빠한테 돈 받아 딸아이 소파 사준 주제 밥이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간다, 한심한 나야. 난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왜 이다지도 생각이 짧은 걸까 싶다가도, 아빠에게 손녀 선물 하나 사달라고 처음 말한 것이 그렇게나 잘못한 걸까 싶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첫째 딸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다가와서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소파를 보자마자 마냥 좋아하는 아이 앞에서 나는 그저 기뻤다. 참 단순한 엄마다.

  친정 단체 채팅방에 아이가 소파에서 펄쩍펄쩍 뛰는 사진을 보냈다.      


  

“잘 샀네.”     

  라는 친정엄마의 한 마디는, 내 가슴속 스크래치의 후시ㄷ, 마ㄷ카솔이 되어 주었다.      






  결혼 전 '내 집'은 꽤 많이 가난했다. 그래도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늘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집에서의 '나'는 풍요로웠다. 내가 원하는 게 많지 않아 내 안에서 만족하며 지낼 수 있었다. 가끔의 미술관과 영화관과 야구장 관람이면 충분히 행복했다. 내 행복은 고스란히 행복 자체로 존재했고 충만했다. 자주 그리고 가득 채워지는 행복은 나를 풍요로운 사람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자족(自足)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풍족하였기에, 경제적 결핍은 내 삶을 함부로 어쩌지 못했다. 경제적 결핍을 느끼기에는 마음이 너무나도 넉넉했다.  


  결혼 후 '내 집'은 경제적으로 매우 안정적이다. 공무원이고 경제관념 뚜렷한 남편이 재산 관리를 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집에서의 '나'는 가난하다. 현금은 늘 부족하고, 카드 사용은 반드시 필요할 때만 가능하다. 나를 위한 소비는, 아주 가끔 혼자 먹는 육천 원의 점심과 삼천 원 정도의 커피뿐이다. 그 외에는 가족을 위한 소비, 육아용품 같은 것들이다. 온전히 나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것을 최소화하고 축소해서인지, 나는 가난하다. 나의 표면적인 경제 상황 때문에 어디 가서 ‘돈 없어’라고 말도 못 한다. 마음이 가난으로 가득 차 있어, 가정의 경제적 풍요가 내 마음에 자리잡을 공간이 없다. 재산세 고지서 같은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중고 뽀로로 소파에도 눈물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인 것을.


  도대체 이 간극을 어떻게 잘 메워가야 하는지, 결혼 8년 차인 지금도 잘 모르겠다.       


  

  

  살다 보면, 삼만 오천 원에 눈물이 진해지는 날도 있다. 뽀로로와 친구들이 그려진 소파 하나에 마음 밑바닥이 문드러지는 날도 있다. 4년 전 그 날처럼. 그런 날들이 모여 추억이 되고, 밋밋해진 추억은 일상의 밑거름이 되고, 밑거름에서 진한 냄새가 올라오는 그 때 진짜 인생이 다져지는 것임을, 뒤돌아보는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대문 사진은, 4년의 시간이 밑거름이 되어 그 사이 태어나 자란 둘째와 셋째가 소파에 성장의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세 아이가 소파에 들러붙어 노는 것을 보면, 소파가 머금은 눈물은 말라 없어지고 그저 친정엄마가 건넨 연고제만 떠오르는 것입니다. '잘 샀네.'

막내와 둘째의 손길에 놀란 포비와 패티를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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