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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an 06. 2021

만 배의 기적

기적은 스스로 기적이라 불리지 않는다 

   먼저, 질문부터 올릴게요.


만 배를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 물론, 한번에 만 배는 불가능할 거예요. 아마 무릎 연골의 수명이 10년은 단축될 거예요. 

   어쨌든, 인생을 통틀어 만 배를 해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질문이 너무 가혹한가요? 그럼 조금 고쳐서 다시 여쭐게요.


삼천배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해보셨거나 또는 도전해 보셨거나 또는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 계시겠지요.


   저는 해 보았어요. 삼천배와 만 배 모두. 삼천배 세 번, 108배 10번 합쳐서 만 배이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20대 끓는 피와 인생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삼천배 앞으로 저를 끌고 갔던 것 같아요. 어쨌든, 했어요. 해냈어요,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요. 새해가 되니 새삼 떠올리게 되네요. 땀 냄새와 신체의 고통과 악에 받쳤던 마음과,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기적'의 의미를요.





   20대 중반, 한국 사회가 정했던 삶의 궤적에서 이탈했던 적이 있어요. 오래 품었던 기자의 꿈을 버리자, 마음은 공허했어요. 그 공허한 마음을 철학으로 채워보자고, 취업의 길에서 유턴하다시피 인도철학의 길에 들어섰어요. 그런데 그 길 위에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친구들의 잇따른 취업 소식에, 나의 있는 곳이 늘 낯설게만 느껴졌어요. 몇 번이고 유턴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서 졸업한 대학 동기들의 앞서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어요. 

https://brunch.co.kr/@1kmhkmh1/44

   불교 재단의 대학, 제게는 개인적으로 20대의 마음공부터였던 그곳은 계룡산에 있었어요. 새벽안개가 멋진 곳이었지요. 첫 학기가 끝나려는 즈음, 삼천배 공지가 붙은 것을 발견했어요. 이제 20대 초반에 들어선 이들에게, 3000배라니. 피식,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는 도대체 누구한테 나오는 거지. 그런데, 꽤 적잖은 친구들이 도전을 하더라구요. 나이 많은 신입생이었던 저는,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막연한 호기심을 무시하기 힘들었어요. 20살 꼬맹이들도 하는데 한 번 해보기나 할까. 이런 마음으로 별생각 없이 신청하게 되었어요.

   3000배 날짜가 다가올수록, 괜한 기대와 두려움과 설렘과 후회가 마구 섞인 감정이 부글거렸어요. 한 번 정도는 도전해 볼만한 데.. 하기 싫다. 어쩌지 못하는 마음만 바라보다가, 결국 그 날이 와버렸어요. 저녁 9시, 지관전(止觀展)에는 10명 안팎이 모였던 것 같아요. 4학년 선배였지만, 그래도 나보다 어렸던 친구의 한 마디를 붙잡았어요.


"해본 사람들이 그러는데, 죽을 것 같을 때 끝난대. 그들도 결국 죽지 않았으니, 한 번 해 보는 거지."


   그래, 하다가 죽을 것 같으면 그만 하자, 그런데 안 죽는다니까 일단 해 보자. 

   500배, 500배, 500배, 500배, 200배, 200배, 200배, 200배, 그리고 100배와 100배.

   처음 500배는 가뿐했어요. 땀이 많이 흘렀지만, 해볼 만했어요. 중간중간 쉬면서 수분도 보충하고 농담도 응원도 주고받았어요. 그러나 500배가 계속될수록 몸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땀은 쏟아지고 비틀거리고 눈물이라고 생각된 뜨거운 것도 솟아나고. 도대체 이걸 왜 한다고 해서 이 고생일까, 와, 사람 이렇게 죽는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 자체가 사라져요. 몽롱함 속에 어떤 명징한 것들이 나를 지배하는 게 느껴져요. 내가 하는 생각과 의식들이 걷히자, 그 뒤에 가려져 있던 순수한 무의식이 드러나는 것 같았어요.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마지막 200배를 향해 달려갔지요. 

   저녁 9시에 시작된 3000배는, 새벽 5시 즈음 200배를 남겨두었어요. 푸르스름한 여명을 등 뒤로 하고 악에 받친 200배를 마무리했어요. 마지막 절을 마치고는 기절하듯 쓰러졌어요. 몸은 땀으로 흠뻑인데,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호흡이 벅찬데, 참 이상하게 미소 짓게 되더라고요. 개운했어요. 해냈다, 이 하나의 생각이 저를 가득 채웠어요.


   그러고 나서 제 일상은, 큰 변화 없이 예전과 여전했어요. 몸이 며칠간 아프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악악 거리게 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3000배를 했다고 무슨 큰 깨달음이 있었다거나 의식의 변화가 생겼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음.. 인생 이력에 '3000배 경험 있음' 한 줄 추가했다는 것 빼곤, 달라질 게 없었지요. 그렇게 첫 3000배의 경험은, 그저 추억으로 남겨지나 싶었어요.



   수없이 흔들리던 여름을 뒤로하고, 내 가을의 선택은 다시 계룡산이었어요. 여름 내내 서울의 현실이 발목을 잡았지만, 한 번 건드린 공부는 깊이를 느껴보고 싶었어요. 2학기, 중관과 유식의 논쟁은 유난히 즐거웠어요. 옛 선사들의 철학 논쟁을 변두리에서 지켜보는 즐거움에, 늘 나를 불안케 했던 '내가 지금 여기서 한가하게 불교학이나 한답시고 이러고 있어도 되나' 하는 마음이 조금씩 옅어졌어요.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 이런 개념 너머의 통찰과 지혜의 의식에 대해 접해볼 기회를 젊은 시절에 가져보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라고 생각되기 시작했어요. 내 생의 앞날에 대한 걱정보다, 인간의 본질과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더 가치롭다는 생각이 나를 채우고 있었어요. 1,2년 일찍 취업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취업만 하고 늘 흔들리기만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나는 지금, 인생의 밑바닥을 단단히 다지고 있는 중이야, 그 위에 무엇을 지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그러던 중에 다시 3000배 신청이 시작되었고, 저는 또다시 별생각 없이 신청했어요.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았으니까요. 오히려, 해내고 났을 때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어요. 역시나 별생각 없이 해냈고, 좀 더 뚜렷해진 마음을 얻게 되었어요. 그 마음을 '지혜'라고 표현하게 된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요. 


   3학기의 마무리도 3000배였어요. 전혀 생각에도 없던 대만 언어교환을 신청한 상태였어요. 인생은 늘 그렇듯 생각지 못한 것에서 생각지 못한 것들을 얻게 되기에, '앞으로의 나날에 도움이 될 씨앗이나 뿌려보자' 하는 생각으로 대만행을 택한 후였어요.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불안감을 해결하기 위해 3000배를 했어요. 3000배 수행은, 불안감을 없애줄 뿐 아니라 특유의 충만감을 채워 주었어요. 대만 행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진리 하나 건져낸 시간이었어요. 

   인생의 처처에서 불안은 늘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사실 별 것 아닐 수 있어요.그 때의 불안도 제게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어요. 불안은 제가 주는 '걱정과 염려'를 먹고 더 커질 수 있었으나, 삼천배가 마음에 힘을 주었어요. 불안을 소화(消火)시킬 수 있는 힘.   


   그렇게 3000배를 세 번 하고 나니, 학기 마무리까지 15일 정도가 남았더라고요. 아쉬움이 일렁거리기 시작했어요. 내 몸에 쌓인 9000배가 나를 두드렸어요. 만 배. 몸이 다 풀리지 않았지만, 다음날부터 새벽에 108배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몸이 아픈 것은 문제가 안 되었어요. 그 당시 제게 만 배는, 인생을 이끌어갈 새로운 힘의 바탕을 새로 까는 작업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게 열흘의 108배를 마쳤어요. 저는 1년 반 시간 동안만 만 배를 한 사람이 되었어요. 

   만 배.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냐구요? 별 다를 것 없었어요.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여름 방학을 보내고 대만을 무탈하게 다녀왔어요. 불교철학과의 인연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저는 현실을 무시하지 못해 서울에서 취업했어요. 지극히 평범한 20대 후반 직장인이 되었지요.






   만 배의 기적. 글쎄요. 기적이랄 건 사실 없었어요. 오히려 인생의 쓴 맛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지요. 애써 무시해 온 학자금이 매일을 짓눌렀고, 연애는 보란 듯이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서른이 제게 준 선물은, '저를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는 눈'이었어요. 가진 것 없고 서울 옥탑방에 사는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의 미혼녀. 이대론 안 되겠다, 연애라도 제대로 해 보자 해서 필사적으로 한 소개팅에서 남편을 만났어요. 갑작스레 유부녀가 되었고, 애를 연달아 셋이나 낳고 지금은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의 삶을 살고 있어요. 



   가끔 만 배를 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래, 그때 쌓아 둔 공덕 마일리지(?!)가 언젠가 쓰일 때가 있긴 하겠지'하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생각이 함께 떠올라요. 그래서인지 일상의 소소한 행운이 펼쳐질 땐 '만 배로 쌓았던 공덕을 이런 식으로 돌려받는 건가' 싶어 지기도 하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이에요. 20년 이상을 비혼 주의로 지낸 제가, 대만지역 전공으로 석사 하며 알게 된 친구의 주선으로 만난 분을 남편으로 삼게 되었더라고요. 남편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며, 지금은 제 삶의 모든 것인 세 딸을 얻게 되었더라구요. 가족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매일 까르르 웃을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나는 일상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더라구요. 그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깨달았어요, 이런 일상이 제게 주어진 것 자체가 '기적'임을. 


   '기적'은 일순간의 놀라운 현상이나 체험이 아니었어요. 반복되는 나날에 큰 불행의 그림자 없이, 오히려 작은 기쁨이 계속 터져 나오는 순간이 연속된다는 사실이 기적이었어요. 기적은 스스로 기적이라고 불리며 행해지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기적은 찾아내야 하는 것이었어요. 일상에 숨어 자신의 일면을 조금씩 보이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이 기적의 씨앗이, '만 배'라고 생각해요. 20대의 청춘을 가득 채웠던 증거인 만 배가 건네 준 지혜는, 제게 '일상에 행복이 있다'는 기적을 알아차리는 눈(慧眼)을 주었어요. 만 배로 쌓았던 공덕 마일리지, 사실 매일 받고 있는 중이었어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손짓,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와 넘치는 사랑으로요. 

생이 이토록 감사하고 충만한 것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마음, 이 것이 다름 아닌 '만 배의 기적'이었어요.     










대문 사진 출처,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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