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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Nov 12. 2020

복식호흡을 하다가

정신일도(精神一到)의 첫 시작, 호흡 가다듬기

아직까지 나보다 복식호흡을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호흡을 깊이 배의 바닥까지 들이마시면 임신 6개월 정도로 배가 불룩해진다.(요즘은 평소에도 임신 6개월 차 배이긴 하다.) 그리고 천천히 내뱉는다. 세 번 정도 반복하면, 세상의 중심이 오롯이 나로 돌아온다. 편안한 상태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글을 쓰기 전이나 글을 쓰다가 막힐 때면 복식호흡을 한다. 그러면 초조함이 많이 사라지거나 새로운 어휘가 쉽게 떠오른다. 리프레쉬, 딱 맞는 표현이다. 글을 쓸 때뿐만이 아니다. 일상의 모든 면에서 복식호흡 또는 단전호흡은 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을 때, 특히 감정적인 측면에서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2008년 여름, 실연을 당하고 열대의 나라 대만을 갔다. 실연의 아픔에 적응 안 되는 더위가 합쳐져 지독한 불면에 시달렸다. 그때 시작된 불면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그런데 적당한 정도의 불면은 복식호흡으로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단전 밑까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숨에 숫자를 센다.(갑자기 분위기 요가) 이 것을 전문 용어(불교 용어)로 하면 지관(止觀)이라고 한다. 멈추고 보는 것이다, 무엇을? 나의 숨, 생명의 근본이 되는 들숨과 날숨을 보는 것이다. 이 행위는 번잡한 생각들을 멈추게 해 준다. 온갖 일상의 일들, 내일의 해야 할 일,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들 사이를 들뛰는 나의 의식을 멈추게 해 준다. 오롯이 나의 호흡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몸 여기저기 쓸데없이 깃들어 있는 긴장들이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난잡했던 나의 생각에 같이 불규칙하던 심장 박동이 정갈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30 정도까지 세고 나면 어느새 잠들어 있거나, 명료해진 의식 속에서 잠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불면에 시달릴 때는 여지없이 지관을 한다. 이렇게 잠든 다음날은 확실히 머리도 덜 아프고 피로도도 평소에 비해 덜하다.


 



   국민학교 4학년(국민학교 졸업한 사람이다)부터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이 사회의 부정을 들추어내고 사회가 바르게 변화하는 데 앞장서고 싶었다. 방송국에 들어가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됐지만, 글을 쓰는 게 좋았다. 여러모로 신문기자가 내게 적격인 장래희망이었다. '중국'을 놓치지 말라는 아빠의 말에, 더 정확히는 중국 특파원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을 위해 중국어를 전공으로 하고 대학교 3학년부터는 신문방송과 정치외교학까지 공부했다. 언론고시 스터디도 문제없이 진행되었고 동네 신문, 잡지사 대학생 기자도 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나를 이미 '김기자'로 불렀고, 너와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4학년이 되었다. 꿈에 다가가기 1년 전이었다. 김기자가 되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 저편에서 이상한 불안이 눈뜨고 있었다.

'기자가 되겠지. 사회부 기자부터 시작하겠지. 열심히 경찰서를 들락날락하겠지. 기사를 쓰겠지. 매일 최선을 다하겠지. 국제부 기자가 되고 상해특파원이 되겠지. 그리고...... 그리고? 그다음은?'


   사실 이 것은 기자 꿈을 간직한 이후부터 따라다닌 질문이다. 목표를 다 이루고 난 다음에 대한 답이 내게 없었다. 꿈 너머의 꿈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오히려 '기사론 작성' 수업 후 기자 선배와의 회식자리에서, '너네 기자 돼서 뭐하려고 그러냐'라며 권태로운 표정을 짓던 선배 기자의 질문이 내 안에서 힘이 세지고 있었다. 기자 되고 나면 난 뭐하지. 뭐가 되어야 하지.  

   꿈이 없는 친구들은 이 회사 저 회사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히려 난 꿈이 있었는데, 그랬기에 더 불안했다. 인생을 뒤흔드는 질문이 매일 계속되었다. 그런 내게 아빠는 저 세계에서 온 이야기를 한다.

"불교를 공부해 보는 게 어때?"


   화를 냈다. 내 꿈을 아는 아빠가, 내가 얼마나 노력해온지 아는 아빠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러나 저 질문은, 오랜 고민 끝에 끝내 나를 돌려세웠다. 20대 중반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었다. 어느 회사에 취직하고 월급을 얼마를 받는 것이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그 지점을 그냥 지나고 나면, 내 인생이 뿌리 얕은 갈대처럼 모든 순간 흔들릴 것 같았다. 나의 인생을 전체로, 제대로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동생이 이미 불교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젊음과는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학과에서 공부하는 동생에게, 뭔가 모를 변화가 느껴졌다. 인생을 공부하기에 종교학은 괜찮아 보였다. '불교'보다는 종교를, 취업을 해야한다는 초조함보다는 어쩌면 나이들면 배우지 못할 것에 대해 배워보자는 마음을 중시해보기로 했다. 지금 기자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기자는 좀 더 늦게 돼도 되지만 인생을 공부해 보기에 지금처럼 좋은 나이가 없어. 과감히 기자를 포기하고 3살 아래 동생의 후배가 되었다. 그때가 스물다섯이었다. 친구들이 신입사원이 되어 회사로 들어갈 때 나는 계룡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계룡산


   신생대학교였으나 불교학으로는 당시 열정적인 교수진으로 가득했다. 지금 서울대 철학과 교수이신 분이, 그때 독일에서 세계 3대 불교학 대가 밑에서 박사를 마치고 그 학교로 왔다. 그분을 필두로 불교철학의 석학들이 미국과 일본, 중국에서 공부하고 모여들었다. 국가지원사업에도 선정되어 문헌 자료도 넘쳐났다. 공부하기 좋은 분위기가 가득했다.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는 좋아하지 않았으나, 교리로서의 불교는 좋았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화엄이나 천태 같은 어려운 중국 불교보다는 인간 심리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명석한 논리로 가득한 인도불교가 좋았다. 유식(有識)이나 중관(中觀) 같은 것을 공부했다. 아침마다 명상을 통해 공부한 것을 체험해 보고자 했다. 20대 중반, 1년 반의 시간 동안 배우고 행한 모든 것은 결국 내 인생의 중심이 되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 주었고, 내 남은 생을 어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주었다. 답은 하나가 아니었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유한한 삶에 대한, 내 안의 복합적인 감정에 대한, 인간관계에 대한, 다방면의 질문에 대한 다차원적인 해답이었다. 이 시기로 인해 기자는 되지 못했지만, 기자가 되었다면 얻지 못했을 커다란 답을 찾게 되었다.


   이 때 요가를 처음 접했다. 매 금요일 오전에 요가 수업이 있었다. 간단한 10가지 요가 동작을 하는 수업이었고, 복식호흡을 배웠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배를 호흡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개월을 노력하니 학기가 끝나갈 즈음 호흡이 배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호흡은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이후 긴장이 될 때나 잠이 오지 않을 때나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격해질 때 호흡을 가다듬었다. 엉망진창으로 들락날락하는 호흡을 정리하고 나면 내면이 함께 정리된다.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들이 사라지고 나서 나의 처지와 환경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내 마음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갑자기 분위기 일체유심조) 나의 감정과 나의 환경이 나를 잡아먹지 않도록, 한발짝 떨어질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어 준다.  불필요한 것들이 정리된 자리에 새로운 것이, 리프레쉬, 솟아오른다. 글을 쓸 때 특히도움이 된다. 적당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을 때, 문장이 가다듬어지지 않을 때 지관과 복식호흡을 3번 정도만 하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어휘가 떠오른다. 문장뿐 아니라 문단을 다시 고쳐 쓰게 된다.

코로 호흡해야 한다. 코의 들숨과 날숨을 보아야 한다. 멈추어 봐야 한다. 止觀


   사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마음 챙김(mindfulness)'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멈추고 나를 돌아보면 나의 지금의 의식상태, 감정상태, 환경상태를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내 고민거리는 어디에서 온 건지, 내 주변의 무엇이 나를 그리 신경 쓰이게 했는지, 그것을 처리할 방법이 무엇인지. 이러한 마음과 감정이 일어날 때 내 안의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 보는 것, 이 행위는 멈춤을 필요로 한다. 이 멈춤을 연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나에게는 복식호흡이다.




   얼른 아이를 재우고 글을 쓰고 싶은데, 어두운 방안을 돌아다니고 물을 달라고 3번이나 말하고 쉬 쉬  쉬하러 가자고 말해서 동생을 깨우고 노래를 불러 자는 언니를 깨우는 둘째를 보노라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 마취총이라도 구해와 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갑자기 들숨을 배까지 마셔보는 것이다. 천천히 내쉬고 나면, 둘째 딸에게 열불 난 마음에 소화기가 뿌려지는 것이 보인다. 그래,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많이 잤구나. 복식호흡 한 번 더 해보면, 잠이 안 오는 아이에게 억지로 자라고 한 것이 아닌가 미안해지는 거다. 갑자기 좋은 엄마가 된다. 복식호흡을 반복하며 내 마음의 분노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둘째는 색색 거리며 자고 있다. 모든 자는 이들은 복식호흡을 한다. 휴식으로서의 수면은 절대적으로 복식호흡이어야 한다. 깊이 들어마신 숨은 뇌까지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고 우리는 다음날을 위한 충전을 한다. 잠든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노트북을 켜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목숨이 끊어진다, 라는 말이 있다. 삶에 치인 호흡은 빠른 리듬으로 인해 배까지 가지 못한다. 가슴까지 가기도 벅차 흉식호흡으로 겨우 일상을 보내게 된다. 두통에 자주 시달리게 된다. 몸이 늙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그럴 에너지가 없게 되면 숨은 목까지만 들어가고 나오지 못한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이다.

   호흡은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지배한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 활동이다. 늘 그렇듯 기본이 우선되어야 한다. 오늘을 내일로 잇는 모든 순간을 가능케 하는 숨쉬기, 이 것이 바로 거친 마음이 정갈해지고 심장 박동이 안정되고 머릿속이 고요해지는 복식호흡이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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