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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Oct 20. 2020

외로울 땐, 브런치를 본다

브런치 동지들이 있어 덜 외롭다

첫째와 둘째를 재우는 데 두 시간 반이 걸렸다. 누워서 검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 감은 척 자는 척하며 내 인생의 두 시간 반을 '버렸다.'(보냈다 라고 해도 되지만 굳이 버렸다 라고 표현했다.) 잠이 안 와 나를 쓰다듬고 나를 만지고 꼬집고 내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손길을 느끼며, 내 인생의 두 시간 반이 새어나가는 걸 잠자코 지켜보았다. 잠이 왔으나 이겨내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쓴다. 아이를 재우며 썩혀버린(그렇다, 굳이 썩혔다 라고 표현한다.) 내 인생의 시간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그냥 썩혀버린 건지. 다른 누구도 대체 불가능한, 유일하게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아이들 재우기를 위해 내 인생에서 포기해버린 그 시간들, 그 시간들을 흘려보내버리고 나서 이렇게 노트북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이 시간은 늘 외롭다.


'엄마'라는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나면, '나'만이 존재하게 되는 데 이 시간은 참으로 외롭다.

세 아이의 엄마가 외로울 새가 어디 있냐고 그러면 할 말은 없다. 오히려 사치다, 외로움의 감정 따위. 그러나 아이들이 다 잠들고 나면, 오도카니 '나'만 남아 있게 된다. 엄마를 제외한 '나'는 헛헛함과 외로움만이 가득 차 있다. 아이들의 엄마로만 살다가, '엄마'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으니 공허한 것이 당연하다. 나-엄마=0 이런 수식을 써 보면 직관적으로 와 닿으려나. 


그런데, 외롭기 위해서 졸음을 참아가며 아이들을 재운다. 진짜 '나'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 엄마를 벗어던지고 '나'를 만나기 위해. 

아이들이 잠든 컴컴한 밤을 둘러본다. 문득,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받는다. 오롯이 밤과 나만 존재한다. 그 외로움으로 흠뻑 샤워하기 위해, 밀려오는 졸음을 몰아내고 몰아내고 마침내는 쓸쓸하게 승리하고야 만다.


브런치 앱을 누른다. 제대로 읽지 못한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다시 읽어 보고, 새 피드 올라오는 구독 작가들의 글을 읽는다. 댓글 써주신 작가의 예전 글들을 읽으며 공감하고, 어제 읽다만 작가의 글을 이어 읽는다. '브런치 나우'로 가서, 이 밤을 공유하고 있는 작가들이 방금 뱉어낸 글들을 읽는다. 그러고는 새삼 깨닫게 된다.


아, 이들도 외롭구나. 


외로운 지점이, 외로운 이유가, 외로운 무게가 다를 뿐, 다들 외롭구나. 이렇게나 외로워서 글로 표현해내고 있구나.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지, 어떻게 외로운지, 왜 외로운지, 그래서 나 좀 봐달라고, 알아달라고 음소거로 세상에 뱉어내는 고독(孤獨). 외로움을 표현하는 문체와 내용이 다를 뿐, 그들의 외로움은 하나같이 똑같구나. 똑같은 밤을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원래 외로움을 잘 타는 이들이 브런치로 몰려드는 건지, 외로움의 형태만 다를 뿐 다들 외로움을 글로 써 내려가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덜 외로워진다. 외롭지 않을 수는 없다. 외로움 그 자체가 가시지는 않지만, 외로움 동지(同志)들이 이 시간 지구 상 여기저기 함께 있음을 알게 되면, 그들의 외로운 이야기를 보게 되면 덜 외로워진다. 외로운 자들이 함께 글을 쓰고 공감하며 같이 외로워한다. 멀리 떨어져 앉아 서로의 글을 보며 빙긋이 웃어주는 그 마음이 브런치 여기저기 묻어 있다. 조금은 따뜻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그제야 하루의 피곤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덜 외로운 채로 잠들 수 있는 것이다. 그 힘으로 다음 날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다시 '엄마'를 뒤집어쓰고 매일의 일상을 살아낼 바닥을 다진다. 


그 매개가 바로 '글'이다. 




이렇게 나의 글은 오늘도 나의 외로움을 싣고 브런치 한 구석을 차지한다, 같은 외로움을 지닌 어느 누군가로부터의 발견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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