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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Oct 14. 2020

사라지는 것들의, 시간

시간 안에서는 영원히 기억되길 

가끔, 어떤 운명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마지막'이라는 느낌은 나에게 좀 더 강하고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최대한 그 시간을 순간순간으로 쪼개어 충만하게 보내고 기억해보려 애쓴다. 다시없을 '마지막'이니까. 


이 뒷모습을 또 볼 날이 올까

며칠 전 아이 하원길에서 본 녀석이다. 순간 직감했다. 나는 어쩜, 이 생에서 이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아. 브라운관 티브이의 뒷모습이었다. 어느 이사 가는 집이 버리려고 밖에 두었다.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사 가는 그들에게서 버려진, 나의 생에서도 예전에 버려진 그래서 잊힌, 사라져 가는 것의 뒷모습. 브라운관 티브이는 나의 생에서 오랜 시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좋아하는 만화도 좋아하던 가수도 모두 그 티브이를 통해서 보았다. 살짝 볼록한 화면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쏟아졌다. 함께한 시간은 길었으나 잊히는 시간은 짧았다. 



3년 전 가을에도 같은 경험을 했었다.

유물이 되어버린 듯한 

날짜도 잊을 수 없다. 2017년 9월 28일. 나는 이 '유물' 앞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폰으로 폰을 찍어 두었다. 아마도 내 남은 생에서 이 모습을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실로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공. 중. 전. 화. 입에 담고 발음해 보기도 어색하다. 공중전화. 다 같이 쓰는 전화라니. 분명 몇 백 원이나 카드를 들고 줄 서 있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생생한 만큼이나 어색하다. 누구에게 전화했던 걸까. 그 밤, 결국 받지 않는 전화에 전화선만 베베 꼬았었다. 누구에게 전화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밤의 꼬인 전화선과 그 선에 얽혀있던 나의 손가락과 공중전화부스 밖의 빗소리만 기억난다. 마음은 꼬인 선과 얽힌 나의 손가락 그 어딘가에 더 꼬이고 더 얽혀 있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잊히지 않게 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저장해둔다. 그 왜곡을 아무 의심 없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잠시 멈춰 선 '나'이다. 잠시 멈춰 그 기억들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고는, 인생의 그 점들을 다시금 연결해 살아나가는 것이다.  


공중전화와 브라운관 티브이 앞에서 '마지막'을 떠올렸다. 그들이 토해낸 마지막은, 내 안의 시간에서 부유하고 있던 장면과 기억들을 건져놓고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소리가 없다.

 무음으로 사라져 버려서 인식할 수도 없다. 어느 순간 사라져 있다. 대부분의 사라지는 것들은 그래서 예고도 없이 내색도 없이, 참 무심하게도 사라진다. 사라진 것들이 그리운 이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이 짙어지는 이유다. 어찌하여도 더 이상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라진 것들을, 자꾸만 추억하고 싶어 지는 이유다. 


그러나, 사라진 것들도 남긴 것이 있다. '시간'이다. 그들이 남긴 시간과 그 흔적은 '우리' 안에 고스란히 있다. 브라운관 티브이도, 공중전화도 사라졌지만 내 안에 그것들은 여전히 있다. 유년시절 방 안에, 비 오던 날 그곳에.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내 안에 있는 까닭에, 그들의 진짜 '마지막'은 오지 않았다. 브라운관 화면이 쏟아낸 모든 것들을 바라본 시간,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선을 꼬며 빗소리를 들었던 그 모든 시간이 내 안에 남아있다. 더 이상 함께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이 남긴 시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순간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충만하게 누려야 하는 이유이다.  


유난히 푸르렀던 내 인생 37번째 가을의 하늘, 그 하늘을 관통하던 바람, 다시없을 6살 첫째의 웃음, 손짓, 막내의 기어가는 발가락, 이 밤의 고요. 익어가는 것들의 결실, 저물어가는 것들의 퇴색. 모든 순간은 늘 마지막 순간이다. 마지막 순간의 것들은 그들의 시간을 남긴다. 그 시간을 기억해두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은 내 안에서 여전히 '그때의 시간'으로 함께 있게 된다. 쉼 없는 인생의 흐름 가운데, 우리가 문득 어느 지점에서 조금 행복해지고 조금 아쉬워할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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