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Mar 25. 2021

오늘의 베스트셀러는 내일의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베스트셀러의 운명



  결혼 전 20대 때는 영화관과 미술관을 자주 다녔어요. 친정 근처에, 영화관에서 나오면 바로 유명 서점으로 연결되는 문화센터가 있었어요.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어서 시간만 되면 서점을 갔어요. 서점은 요즘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어요. 신문이 그날그날의 단편을 모아둔 '교과서'였다면, 서점은 '트렌드, 흐름'을 알 수 있는 훌륭한 '교실'이었어요.


  서점에 들어서면 거의 정면으로 '베스트셀러' 칸을 볼 수 있어요. 각 영역별로 베스트셀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요. 시간이 없을 땐 베스트셀러만 훑고 나와도 요즈음의 흐름과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몇 발자국 더 가면 신간들이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를 맘껏 뿜어내며 누워있어요. 나를 보라고, 내 제목과 디자인 멋지지 않냐고, 내가 미래의 베스트셀러라고, 그러니 나를 집어 계산대로 가라고 침묵의 아우성을 외쳐대요. 그곳에서는 정말 고요한 경쟁이 치열함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2-3주 후면 정말 그중에 하나가 자리를 바꿔 베스트셀러 칸에 가 있어요. 누워있던 신세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자세로 바꾸어요. 그 책이 누워있던 그 자리에는 또 새로운 아이가 자신의 용모와 자태를 뽐내며 구매를 구걸해요.

  내 발을 잡아끄는 고한 경쟁의 장을 간신히 지나 '시집' 코너로 발을 옮겨요. 이 곳의 고요는 그곳의 고요와 차원이 달라요. 적막으로 둘러싸인 진정한 고요, 정도가 그나마 어울리는 표현 같아요. 차라리, '고독'이 어울리겠어요. 그 넓은 서점에서 유난히 외로움이 느껴지는 곳이니까요.

  시집은 가격 부담이 없어서 꽤 샀었는데, 집에 와서 몇 번 휙휙 넘겨 보곤 다시 중고시장에 내다 팔곤 했어요. 쳇, 어차피 쓰지도 않을 시, 써 봤자 시집을 쓴 자들의 발톱도 못 따라갈 내 시, 이런 시집 열심히 본다고 그들을 따라갈 수 있겠어, 라며 온갖 질투와 시기심과 못난 감정을 한데 모아 부글부글 끓이고는, 넘쳐흐르면 불을 딱 끄는 거예요. 불이 꺼지면서 찾아드는 냉정함에 시집도 시시해져서 헐값에 팔아버려요.

  2000년대와 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라며 열심히 무시해도 '시집 베스트셀러'는 따로 있더라고요. 영원할 것처럼 거의 비슷한 이름들의 거의 비슷한 제목들이 자리를 차지해요. 3일을 연속으로 검색해 봐도 거기서 거기인 베스트셀러들. 아, 이건 그들만의 리그구나. 시를 향한 나의 마음, 나의 시를 세상에 보내볼까 하는 약한 순수(純粹) 따위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어요.







  오늘도 수많은 책들이, 시집들이 출판시장에 쏟아졌어요. 그들의 최종 목표는 - 설사 그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종국에는 - 바로 저 '베스트셀러' 칸일 거예요. 자랑처럼 용맹을 과시하는 그 자리를 장래희망으로 품고서는, 이곳저곳에서 물성을 지니고 태어날 거예요.


  저 역시, 시를 생각할 때는 그랬어요. 시로 '베스트셀러'가 되어보는 꿈을 잠깐 꾸었다가, 바로 깨버렸어요. 어제의 베스트셀러는 오늘을 거쳐 내일의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니까요. 그 거대한 중력에 나의 시들은 으깨어졌어요. 그래도 숨이 끊이지 않기에, 여전히 살아있기에 나의 시들을 살려보기로 했어요, 바로 이 곳에서요. 영원히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할 나의 시를, 제 가슴과 제 은하계(galaxy)에만 존재했던 시를 조금씩 이 곳에 풀어주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팔아넘긴 (사실은 엄청 훌륭했던) 시집을 토양으로 삼고 자라서인지, 으깨어진 줄만 알았는데 꽤나 형태를 갖추고 있었어요. 조금 더 햇빛을 쐬어 주고 물을 줘야겠어요.

  이제라도 놓아주게 되어 참말로 다행이에요.  





이전 06화 이끼만이 채워놓은 방명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