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의 울분
거의 매일 빨래를 해요. 어린아이가 셋이라 빨래 양이 많아요. 어느 날은 아이 빨래만 두 번을 세탁기 돌리고, 어느 날은 아이 빨래, 어른 빨래, 이불 빨래 세 번씩 돌릴 때도 있어요. 딸이 셋이다 보니, 옷이 줄어들면 물려 입히지 못하게 될까 봐 건조기에 넣을 수 없어요. 아이들 빨래는 일일이 손으로 털어서 널어 말려야 해요.
세탁기 알람이 울리는 시간은, 제가 엄마임을 재인식하는 순간임을 매번 확인하는 때에요. 밥이 다 되었다는 시간, 아침 기상 알람, 아이 하원 알람 같은 때에도 같아요.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은 '저'로 존재하다가, 빨래 알람이 울리면 '엄마'가 소환돼요. '엄마'라는 단어만큼 묵직한 빨래들이 세탁기에서 울컥울컥 쏟아져요. 어제의 전생에 묻어온 먼지와 오염들을 씻어내고 새로 태어난 빨래들을 안고 있으면, 복합적인 감정들이 향긋한 유연제 향과 어우러져 쓸데없이 불안해져요.
내 더러운 손이 이 깨끗한 빨래들을 함부로 만져도 되는 걸까, 깨끗해졌다는 너희에게서, 탁탁 털수록 더 쏟아지는 먼지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빨래도 인생도 어쩜 이다지도 완벽하지 못하단 말인가. 먼지를 털어서 널어 말린다 한들 결국엔 다시 들러붙을 먼지들, 나는 왜 이다지도 최선을 다해 털어내는 걸까. 결국엔 이렇게 축축 늘어진 자세를 취할 것을, 무얼 그리 산뜻해져 보겠다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흠뻑 머금었단 말인가. 단 한순간도 자신의 의지 없이 모든 오염을 받아들인 빨래들, 그 서러움과 억울함을 마주하고 있다 보면 결국 내 안의 비슷한 불안들이 숨을 토해내는 거예요.
나 역시 빨래만큼 깨끗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 나 역시 내 의지만큼 내 바람만큼 엄마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 그래서 아이들의 성장에 문제가 있게 되면 그 책임 앞에서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고 서있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 '엄마'로 존재하기에 내가 적합한 인간인지에 대한 불안. 빨래 더미를 옆에 두고 하나씩 하나씩 털며 널다가, 결국 빨래만도 못한 저를 발견하고 말아요.
그래요, 그런 나날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중이에요. 엄마라는 이름으로 육아와 가사를 뒤집어쓰고 보니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우울의 증거를 쉽게 찾았어요. 이 시 역시, 빨래를 널면서 먼지보다 더 많은 우울의 횟수를 세고 있을 때 떠올랐어요. 빨래를 하고 널고 개는 순간마다, 어느 때가 더 우울한 지 경쟁하는 기분이었어요.
다행. 다행(多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햇살 덕분이었어요. 빨래를 다 널고 나니 햇살이 빨래를 어루만지고 있더라고요. 아,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바람도 불어왔어요. 빨래는 비록 여전히 먼지가 붙어 있고 전생의 얼룩이 다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런 빨래 곁에 햇살과 바람이 있었어요. 빨래는 그 모든 염오를 말려줄 햇살과 바람을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햇살과 바람은 공평해서, 못난 제게도 똑같이 비추었고 불어왔어요. 그래서, 시를 완성할 수 있었어요. 햇살과 바람과 시가 있어서, 제 안의 불안도 우울도 쫙쫙 펴서 말릴 수 있었어요.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다시 글을 쓰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중이에요. 엄마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육아와 가사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어느 밤엔 엄마의 허울을 옆에 벗어 두고 한낮의 햇살과 바람을 떠올리며 이렇게 시와 글을 써요. 이제는 내 안의 다행과 희망이 경쟁하는 순간들이 많도록 할 것이에요, 나의 의지와 바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