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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23. 2021

이끼만이 채워놓은 방명록

돌의 연세(年歲), 시의 서사에 대한 고백



  작년 여름, 장마가 오랫동안 이어졌어요. 근 두 달을 계속 비가 내리더니, 비가 그친 어느 날 집 앞 돌무더기에 이끼가 올라와 있었어요. 순간, 그 돌은 그냥 집 앞 돌이 아니었어요. '두달간의 장마'라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품은 돌이 되었어요. 그리고는 문득, 혼자 떠났던 경주의 불국사 돌담이 떠올랐어요. 그 돌담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세월의 허락을 받고, 만져 봤어요. 돌의 세포들이 깨어나 천년의 시간을 조곤조곤 수다 떨었어요. 천년 전 자신을 들어 올려 쌓은 자부터, 자신이 지켜본 수많은 불자(佛者)들의 이야기까지. 가만히 듣다 보니 어느새 돌은 따뜻해져 있었어요. 돌이 보내오는 천년의 햇살, 천년의 달빛,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어요. '시를 쓰니까 그런 게 느껴지나 보지'는 아니예요, 그렇게 어려운 작업이 아니에요. 돌들은 각자의 세월과 역사를 품고 있어요. 집 앞의 돌도 무던한 세월을 지내다가, 두 달의 장마라는 유례없는 사건을 맞이하고는 그 일을 온몸으로 껴안게 된 거예요. 그 이야기를 이끼라는 형태로 뿜어낸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저더러 받아 적으래요, 시를요.


  '돌의 연세'는, 장마를 지나온 돌과 돌의 또 다른 자아가 된 이끼가 불국사 돌담을 불러내어 저를 통해 읊은 시예요.



  




  이 시로 저는, 조금은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심보선 시인은, 짧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어찌 그리 짧은 시를 쓸 수 있느냐고 물으며 부러워했다지요. 저는 긴 시를 쓰는 시인이 부러운 데 말이죠. 서사를 시로 옮길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부러워했어요. 네, 저는 긴 시를 쓰지 못해요. 저는 일상으로부터의 단편, 한 컷, 한 장의 이미지를 시로 그려내요. 하나의 인상(印象)을 시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은 겨우 어찌어찌해내요.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는 기-승-전-결은 시로 만들어내지 못해요. 기껏 써봤자 늘어지고 재미없는 산문만 쓰게 돼요. 산문시, 라는 게 있다고요? 맞아요, 하지만 산문시도 결국엔 시예요. 하지만 저는 시에 관한 한 타고난 능력이나 재능 같은 것이 없어서, 산문시는 도저히 못 쓰겠어요. 산문시를 쓰려다 보면 산문이 되어 버려요. 지루하고 장황한 조사의 연결만 끊임없이 나열해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또 다시 한 장면만 콕 박힌 시만 쓰게 돼요. 제 시들이 하나같이 짧고 서사가 없는 이유예요.

  이 이유로 오랫동안 저는 제 시를 미워했어요. 긴 시를 쓰고 싶었으나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이었어요. 짧은 시는 '시'하고 발음하기 전에 끝나 버렸어요. 도저히 시가 시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장면이 어쨌다는 거야, 왜 그것밖에 쓰지 못해, 무엇 때문에 이야기가 흐르는 시는 너에게서는 태어나지 못하는 거야,라고 혼자 자책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 시간의 마무리 즈음에 이 시를 썼어요.

  돌이 건넨 시에서, 저는 분명 이끼 낀 장면만을 썼는데 다시 보니 '돌의 서사'가 있더라고요. 아, 하고 깨달았어요. 감히, 내가 감히 주체가 되어 시를 쓰려했기에 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없었다는 것을요. 시의 장면을 두고 가슴에 구멍 내고 있으면, 그 구멍을 통해 시의 긴 스토리가 천천히 밀려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짧은 시이지만, 이제 조금은 알게 되었어요.

  시에도 역시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시의 '연세'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요.  








*제 매거진 '추억의 구석' 타이틀은 이 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구멍'의 은유는, 댓글시인 님께서 적어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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