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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15. 2021

성스런 안식을 취한다

전투양말

琳은, 시 쓰는 필명입니다.



  제 남편은 군인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매일 출퇴근하는 '군인'과 같이 살고 있어요. 퇴근한 군인은, 양말을 빨래통에 벗어 두어요. 우리 부부는, 흔히 신혼부부의 주요 싸움 소재인 '치약 끝에서 짜기 vs 중간에서 짜기' 라든가 '양말 뒤집어 아무 데나 벗기 vs 그냥 벗어 빨래통에 넣기' 같은 거로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우리 집 군인은 늘 치약을 끝부터 짜서 쓰고, 양말은 그대로 벗어 빨래통에 넣으니까요. 

  문득문득 빨래통을 볼 때면, 진한 초록의 전투양말이 있어요. 대부분은 구멍이 나 있어요. 위치는 상관없이 거의 구멍 나 있어요. 어떤 양말은 발가락 쪽, 어떤 양말은 뒤꿈치 쪽. 너무 심할 때는 '이번만 빨아 신고 버려야겠다'라고 하지만, 늘 습관처럼 벗어서 다시 빨래통에 넣어요. 그러면 또 빨아서 신고 또 신고, 반복되어요. 늘 버리는 때를 놓치다가, 결국에 버리는 건 저구요. 





  그 양말들을 보노라면, 제 안의 시 쓰는 이는 '종교'를 떠올려요. 하루의 모든 고통과 속죄를 다 짊어지고 자신이 다 용서하려는, 그런 구원 같은 이를 떠올려요. 그가 얼마나 고되었을지, 또 얼마나 한탄스러웠을지 얼마나 자신의 주인을 원망했을지 그 구멍에 비친 얼굴이 그려져요. 

  그래서 자꾸, 미안해져요. 우리 가족의 모든 생계를 책임지고는, 자기는 그저 저 어둡고 습한 빨래통 속에 기대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이 그 주인을 닮기도 했어요. 하루의 모든 시간을 충성과 필승과 단결과 전진에 쏟아붓고, 그 양말처럼 어두운 집에서 더 어두운 잠에 들어요. 자신의 구멍 돌볼 새도 없이 자신의 주인과 자신의 주변을 움직이게 해요. 하루하루가 전투이고 그 전투를 쌓고 쌓아 일생을 분투해서, 구멍만큼의 명예를 얻어요. 세상에 단 한 존재, 주인의 양말만이 견장(肩章)의 무게를 알 거예요. 그만이 그 구멍을 통해 주인의 걸음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이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늘 구멍 난 양말을 버리지 못하고 신는 '군인'과 사는 가족이에요. 양말과 주인이 지고 있던 일상의 무게를 덜어줄 마음을 찾지 못해, 이렇게 시만 끄적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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