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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Oct 18. 2020

시를 품고 산다는 것

시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가을이다.

시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뜻이다.




20년째, 가을이 오면 함께 오는 시가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고등학생 시절, 모의고사 언어영역 문제를 풀다가 이 시의 첫 구절을 보고는 울컥 울음을 터뜨렸다. 가을이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눈물은 그냥 흘렀다. 시험지를 꽤나 적셨지만 멈출 생각도 없었다. 한참을 울고 진정을 하고 문제를 풀었다. 문제를 푸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으나 문제는 풀어야 했다. 결국 시간이 부족해 마지막 몇 문제는 찍었다. 그 역시 문제 되지 않았다. 이 시를 만난 것이, 그것이 큰 문제였다. 그 후 이 시는 내 인생의 가을마다 찾아왔다. 그리운 사람이 있든 없든 찾아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면, 이 시를 그리워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그 이를 그리워했고, 그리운 사람이 없으면 과거에 그리워했던 그 이를, 그 과거의 나날을 그리워했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 자리를 찾아 헤맸다.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모습을 보며 또 시를 감탄했다. 시인의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나 먹먹한 시구를 찾아내는지, 지어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시인이 될 수 없음을, 매 가을마다 느끼며 이 시를 읊었다.



가을은 또 다른 시를 불러온다.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_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첫째를 낳고 나서 남편의 지인이 보내온 시였다. 아아, 시는 이렇게나, 몇 글자 안 되는 글귀로 인생을 관통하는 것이다.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시는 가을에 썼을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함께 오는 사람은, 가을에 오는 사람일 것만 같다. 내 마음이 흉내 내고픈 바람은 가을바람일 것이다. 어마어마한 사람을 맞이하는 마음을 준비하기 위해, 긴긴 마음을 부여잡고 시를 써 내려가고는 마침내 마지막에서야 . 어마어마한 마침표를 찍는다. 이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환대를 하기 위한 마음, 그 마음을 준비하는 시, 환대의 준비를 마치고서야 . 온전한 마침표를 찍는 마음. 어떤 마음인지 알 것만 같아, 조금은 숙연해지고 조금은 설레기도 하다.


이 시는, 나의 아이들을 떠오르게도 한다.

내 뱃속의 과거와 현재와 너희 앞에 펼쳐진 미래까지 부여잡고 내 삶에 방문한 너희들. 너희의 일생을, 그렇게나 작은 손에 꼭 쥐고 엄마에게 온 너희들. 삶의 걸음걸음마다 부서지는 마음에 어쩔 줄 몰랐을 너희들.

그런 너희를 환대하고자 바람을 흉내 내었건만 쉽지는 않았다. 내 삶을 축복하기 위해 방문해준 너희를 매일 맞이하건만, 나는 고달픔의 얼굴을 지녔다. 환영은 성대하지 않고 대접은 어설펐으나 너희는 그렇게 일상처럼 방문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함께 오는 너희를 맞는 일은 어마어마한 일이기에, 나는 오늘도 바람을 더듬어보려 하는 것이다. 너희의 일생을 환한 마음으로 환대하기 위해.


 


시가 오는 밤이 있다.

나는 그저 무력해져서 시를 받아 적어야 한다.

그것은 기쁨이고 축복이다.

시는 아무렇게나 오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초를 켜는 마음으로 받아 적는다.

마음의 그을음이 어둠보다 검어졌을 때, 삶이 소화시키지 못한 서러움이 역류할 때, 계절이 추억을 깨워 일으킬 때, 시는 밤의 바닥을 기어 온다.


위의 시들은, 내 시의 밭이자 스승 같은 시이다. 시가 메마를 때 서정주나 정현종 같은 시인들이 물을 주면 내 시는 살아난다. 그래서 가을은 내 시의 봄이다. 내 시가 움트려 하는 때이다.

시를 품고 있다가, 어느새 마주하는 가을에 시를 꺼내야 한다.


바야흐로 시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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