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듯, 이번에도, 시가 살렸다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능한 모든 변명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으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평화가 린나이 보일러처럼 자알 작동하는 곳'(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中)이라는 구절에서는 나도 모르게 '하아-' 하고는 잡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어요. 그런 구절은 쉬어 줘야 해요. 눈물이 나오려다 참으면 눈물이 다시 들어가는, 그런 기분을 고스란히 느껴야 해요. 아버지를 보낸 방을 바라보는 시인 앞에서 너무 쉽게 울면 안 되니까요.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청춘 中)라는 구절에서도 펜을 내려놓고, 지금의 내가 젊은 시절의 나와 악수를 한 번 해줘야 해요. '너무너무 이해하는 구절이어서 그냥 콱 젊은 나를 안아주고 싶을 때'라는 답시의 문장도 떠올려야 해요.
나, 활자 곁에 있어도 되겠구나. 활자 곁에 있어야 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