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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30. 2021

베어내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고귀한 찰나

칼의 본성

 

  하마터면 깊이 베일 뻔했어요. 카레를 하려고 당근을 썰다가 칼이 엇나가 손톱을 잘라냈어요. 피는 조금 났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아휴, 맨날 이러냐 진짜. 당근이나 무 같은 것을 썰 때면 거의 대부분 비슷한 사건사고를 겪어요. 칼질에 도무지 익숙지가 않아요. 채 썰기도 아니고 몽당 몽당, 몽당 썰기인데도 그래요. 도대체 언제 좋아질지 모르겠어요. 칼질이 좋아질 날이 오기나 할까요. 

  칼을 노려 보았어요. 다 너 때문이야. 그런데 아무리 노려 봐도, 칼은 무심하더라고요. 다시 잡기가 겁이 났지만, 겁이 난 건 나뿐 칼은 손톱을 자르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어요. 그러고 보니, 사실 칼의 역할은 그거였어요. 무엇이든 잘라 내는 것, 힘이 가해지는 대로 자르고 잘라내고 갈라내는 것. 칼의 방향을 잘못 잡아준 나의 잘못이었지 칼은 그저 늘 그랬듯 그렇게 잘라냈을 뿐이었어요. 


  칼 없인 우린 무엇도 먹지 못해요. 카레에 넣을 그 모든 재료들은 칼로 잘라내야 하는 것들이었어요. 당근 하나, 양파 하나, 고기 한 덩어리 이렇게 넣을 수 없어요. 그 무엇도 칼이 스치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칼이 허락하는 절단, 그것에서 파생하는 단절로 우리는 사실 먹고 살아가는 것이었어요. 

  '칼'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은, 그러니까 죽인다거나 피가 묻어있다거나 그래서 다른 이름인 '흉기'로 불린다거나 하는 것들은 대부분 그런 사건과 연관되었기 때문이었어요. 사실 우리 생활, 우리 일상에서의 칼, 특히 주방에서의 칼은 나와 가족을 먹이고 살리는 존재였어요. 칼을 거쳐야 비로소 진짜 음식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어요. 칼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이어주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칼 스스로는 모든 것을 절단하고 단절시키지만, 그 행위로 비로소 생명과 생명을 연결해주고 있었어요. 매일 칼을 잡으면서, 칼의 그런 본성을 단 한 순간도 헤아려 본 적이 없었어요. 자신의 본분은 무던하게 숨기고 감춘 채 절단, 단절, 절단, 단절을 연속하고는 끝내 다른 이들을 살려내고 있었어요. 







  잘라낸다는 의미, 늘 멀리하려고만 했어요. 잘려나가고 떨어져 나가는 것은 그저 아픈 것이라고만 했어요. 그래서 덕지덕지 연결하고 붙이고만 있었어요. 어느 순간, 삶이 자꾸 아래로만 침전하려 했어요. 잘라내야 할 것들을 잘라내지 못하자 생의 무게가 무거워져 가라앉으려고만 하는 거예요. 용기 내 '칼'을 잡았어요. 그래요, 용기가 필요했어요. 나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손에 칼이 쥐이자 잘라내야 하는 무수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과거에의 후회와 미련, 사람에 대한 아쉬움, 계속 커지기만 하는 분노와 증오, 나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무더기들. 잘라내는 것은 쉽지 않고 여전히 자르지 못한 것들도 있어요. 그러나 분명한 건, 자르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내가 태어난다는 사실이었어요. 칼의 도움으로 나 역시 새로운 자아를 갖게 될 수 있었어요. 

  나는 새로워졌는데, 내 손의 칼은 그대로예요. 아니 오히려 조금 더 마모되었어요. 끈질긴 것들을 잘라내느라 스스로는 오히려 더 닳고 더 거칠어졌어요. 그러고 보니, 칼은 태생부터 서로의 단면을 볼 수 없었어요. 타자(他者)의 새로운 생을 위해 자신은 처음부터 이분되어 한순간도 스스로의 정면을 가질 수 없었던 존재, 칼이었어요. 영원히 이분(二分)된 본성을 품고서는, 다른 이마저도 가르고 자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생을 부여해주는 칼. 조금씩 마모되었지만, 그 역시도 칼의 본성이었어요. 





*보디사트바(Bodhisattva), 산스크리트어. 한역되어 보리살타에서 보살이 되었어요. 타인을 위해 깨달음을 미루고 타인의 깨달음을 돕는 자에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현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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