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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Apr 06. 2021

구름은 하늘을 잡아먹고 있었다

어느 오후


  작년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어요. 저는 목격자였어요. 제 두 눈은 똑똑히 보았고,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구름이 하늘을 잡아먹는, 그것도 아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장면을요! 아.. 저러다가는 비가 아닌 피가 내릴 것만 같은데.. 하는 불길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어요. 이 도륙의 현장에서 피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하늘이 내리는 피에 익사하게 될 거야. 얼른 벗어나야 해. 

  안타깝게도 철 모르는 아이들은 놀이터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어요. 더 심각한 것은, 놀이터의 모든 생명들, 그러니까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 개미떼와 놀이터 바로 위를 날고 있는 새들까지 그 누구 하나 피할 생각이 없었어요. 우리는 모두 잔인함의 극치를 달리는 현장에 있었는데,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비극이었어요. 나 혼자 어쩔 줄 몰랐어요. 그리고 끝내 하늘은, 비린내 풍기는 비인지 피인지를 쏟아내기 시작했어요. 그제야 하나같이, 늦은 지각(知覺)을 쓸어 담을 시간도 없이 각자의 숫자가 적힌 동굴로 숨어 들어갔어요. 어떤 이는 107, 어떤 이는 110이라는 부호 밑으로 뛰어갔어요. 구름은 보란 듯이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모든 생명은 뒤늦게 알아차렸어요. 







  그런 날이 있어요. 분명 시간은 오후 두 시인데, 밖은 밤처럼 어두운 날. 햇빛이라는 게 존재하긴 했었나, 오후(午後)라는 단어의 의미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건가, 싶은 그런 날이요. 그런 날은 저는 여지없이 구름의 살의를 느껴요. 

  모든 사물이 장(長)과 단(短)을 갖추고 있듯이, 구름도 그러해요. 태양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평소에는 힘을 드러내지 않아요. 태양의 나체를 우리에게 보이기도 하고, 그저 세월아 네월아 속절없이 흐르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힘을 과시하고 싶을 때 진면목을 드러내요. 세상의 모든 검은 어둠을 끌어모아 태양과 하늘을 잡아먹어요. 낮과 밤은 의미를 잃게 돼요. 우리의 '생활'이나 '일상' 같은 친숙한 어휘는 포악한 구름 앞에서 박동을 멈추게 돼요. 구름, 이라는 예쁜 단어의 뒷면에서 낯설고 거친 악의를 발견할 수 있어요. 

  역설적이게도 그 악의의 끝에, 생명을 살리는 비가 있어요. 우리 모두는 비를 맞으며 다시 태어나요. 비를 맞은 모든 존재가 목구멍을 넘어갈 때, 우리의 호흡과 우리의 순환과 우리의 체온은 유지될 수 있어요. 피를 만들어주는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면, 밤을 가장했던 오후를 다시 일으키는 태양을 볼 수 있어요. 물론 이는 순전히 구름의 허락이 있어야 해요. 구름이야말로 하늘의 권능자이니까요. 우리는 모두 이렇게나 나약하게, 구름의 위선과 변덕의 영향 아래서 꼼짝없이 살아가는 존재예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대부분의 시간을 하얀색으로 위장한 채 '순수함'을 거들먹거리는 구름의 이면을 알리라고, 시가 제 왼편 어깨를 두드렸어요. 받아 적은 시를 꺼내었으니 다들 지금부터, 구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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