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가격은 ‘예정가격’을 위해 존재한다

#공공계약의 시선

by 조민우

"그래서, 우리 얼마에 계약할 수 있는데요?"

수많은 시장 조사를 거치고, 견적서를 받고, 감정평가를 했다 하더라도

결국 계약 담당자가 마주하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존재하는 절대적인 기준,

그것이 바로 ‘예정가격’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거래실례가격이나 견적가격은

이 예정가격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자 ‘재료’에 불과하다.


요리로 치면 밀가루 반죽이고, 야채 손질이다. 이 재료들이 모여 결재권자의 도장을 받는 순간, 비로소 ‘예정가격’이라는 ‘요리’가 완성된다.

그리고 낙찰자 결정의 모든 운명은 이 가격이 쥐고 있다.


1. 신의 영역, ‘복수예비가격’의 탄생

과거에는 담당자(재무관)가 몰래 정한 하나의 가격(단일예가)이 곧 법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정하는 숫자는 유출되기 마련이고, 이는 비리의 온상이 되었다.

그래서 공공계약은 인간의 손을 떠나 ‘확률의 신’에게 가격을 맡기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복수예비가격(복수예가)시스템이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강력하다.

기초금액을 기준으로 일정한 범위 내에서 서로 다른 15개의 가격(예비가격)을 무작위로 만든다.

입찰에 참여하는 업체들이 이 중 2개씩을 추첨하고, 가장 많이 선택된 4개의 가격을 뽑아 그 평균을 낸 값이 최종적인 ‘예정가격’이 된다.


아무도 모르는 15개의 숫자, 그리고 누가 무엇을 뽑을지 모르는 우연성.

이 이중 장치가 공공계약의 공정성을 지탱한다.


2. ±2%와 ±3%의 미학

이 15개의 예비가격을 만들 때, 법은 일정한 ‘범위’를 둔다.

국가계약법:기초금액의 ±2%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지방계약법:기초금액의 ±3%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고작 1%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입찰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이 차이는 태평양과 같다.

범위가 넓은 지방계약(±3%)이 국가계약(±2%)보다 변동성이 커서 ‘운빨’이 작용할 확률이 더 높고,

국가계약은 좀 더 촘촘한 예측이 필요하다.


3. 정규분포의 마법과 ‘낙찰하한선 미달’의 속사정

수많은 업체가 입찰에 참여해 2개씩 번호를 뽑다 보면, 예정가격은 통계학적으로 ‘정규분포’를 따르게 된다. 즉, 예정가격이 양쪽 끝(최고가나 최저가)보다는

중간값(평균) 근처에 형성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뜻이다.


선수(입찰 전문가)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업체가 낙찰 확률이 가장 높은 구간에 촘촘하게 몰려서 투찰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모두가 "이 즈음이겠지" 하고 바늘구멍 같은 구간에 승부를 걸기 때문에,

실제 예정가격이 예측보다 조금만 낮게 형성되어도 수많은 업체가 우수수 탈락해 버린다.

계약 담당자가 개찰 결과를 열었을 때,

1순위부터 수십 위까지 "낙찰하한선 미달"이라는 붉은 글씨가 줄줄이 뜨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다들 정답에 너무 가까이 가려다 선을 밟아버린 것이다.


4. 단일예가는 언제 쓰는가?

그렇다면 복잡한 복수예가 대신, 예전처럼 딱 하나의 가격만 정하는 ‘단일예가’는 사라졌을까? 아니다.

여전히 쓰인다. 바로 수의계약을 할 때다.


경쟁이 없는 수의계약에서는 굳이 확률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

담당자(재무관)가 정해놓은 가격(단일예가)을 기준으로 업체와 협상(시담)을 하여,

그 가격보다 낮으면 계약을 체결한다.


이때의 단일예가는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금액 이상은 주지 않겠다"는 상한선을 확인하는 형식적인 절차로 활용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공정성을 위해 15개의 가격을 만들고(복수예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통계적 확률(평균)에 따라 결정된 단 하나의 숫자에 승복한다.


낙찰자가 결정되는 순간, 그 가격은 담당자가 만든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예정가격은

가장 차갑지만,

가장 공정한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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