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집행의 역설
"주무관님, 이번 주까지 집행률 60% 못 맞추면 우리 시(市) 페널티 먹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 내보내세요."
매년 1월 2일, 시무식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기획예산부서에서 날아오는 공문은 사실상 ‘선전포고’와 다름없습니다. 모든 지자체 상황실 벽면에는 거대한 현황판이 붙습니다. 이름하여 ‘상반기 신속집행 추진 상황판’.
부서별로 목표 달성률이 막대그래프로 적나라하게 표시되고, 실적이 저조한 부서장은 매주 간부회의에서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이 숫자를 채우기 위해 공무원들은 1월의 칼바람 속에서 웃지 못할 촌극을 벌입니다. 오늘은 그 ‘숫자 전쟁’의 서막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1. 경제학 교과서와 건설 현장의 괴리
신속집행의 명분은 거창합니다. 정부가 재정을 상반기에 집중적으로 풀어서 침체된 민간 경기를 부양하고, 경제 성장률을 견인하겠다는 ‘케인즈 경제학’의 실천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훌륭합니다.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를 뚫어주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타이밍’입니다. 대한민국의 1월과 2월은 동절기입니다. 땅은 꽁꽁 얼어있고, 콘크리트는 양생되지 않습니다. 즉, 공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공사를 못 하니 ‘기성금(진행된 만큼 주는 돈)’을 청구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돈을 풀라고 합니다. 현장에는 삽도 못 떴는데, 서류상으로는 돈이 나가야 하는 기이한 상황. 여기서 담당자의 고뇌가 시작됩니다.
2. 원인행위(계약)와 지출(현금)의 간극
많은 분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계약만 빨리하면 되는 거 아니냐?" 아닙니다. 신속집행의 평가는 ‘계약 체결’이 아니라 통장에서 실제 현금이 빠져나간 '지출(Disbursement)’을 기준으로 합니다.
계약을 100억 원어치 맺어도, 실제 업체 통장에 꽂힌 돈이 0원이면 집행률은 0%입니다.그러니 담당자는 멀쩡한 보도블록 교체 공사를 한겨울에 발주하고, 여름에나 필요한 에어컨을 1월에 구매 품의합니다. 물건을 받기도 전에,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돈을 줘야 하는 압박. 이것은 행정의 기본 원칙인 ‘검수 후 지급’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위험한 줄타기입니다.
3. "제발 돈 좀 받아가세요" 읍소하는 갑(甲)
이 시기가 되면 갑을 관계가 역전됩니다. 공무원(발주처)이 업체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합니다."사장님, 공사 착공계 내셨죠? 선금(Pre-payment) 신청 좀 해주세요. 제발요.""아니 주무관님, 아직 자재도 안 들어왔는데 무슨 선금입니까? 보증수수료 나가게...""수수료는 저희가 어떻게든... 일단 70% 받아가 주십시오."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제발 돈을 가져가 달라고 애원하는 촌극.
이것이 매년 반복되는 대한민국 행정의 1분기 풍경입니다.
숫자를 맞추기 위해 원칙이 흔들리는 현장,
과연 이 속도전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