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게 막으려다"
나라 곳간 다 털린다

표준품셈 무시하고 내 맘대로 깎은 가격의 최후

by 조민우

"주무관님, 예산이 10억밖에 없는데 설계가 12억이 나왔네요. 품셈에서 할증 좀 빼고, 단가도 최저가로 맞춰서 기초금액을 10억 밑으로 맞춰봅시다. 어차피 들어올 업체는 다 들어와요."

설계 내역서를 검토하다 보면 예산이 부족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때 담당자는 '마른 수건 짜기' 신공을 발휘합니다. 표준품셈에 정해진 노무량을 살짝 줄이거나, 자재 단가를 시장 조사 가격 중 가장 싼 것으로 갈아끼웁니다.

명분은 훌륭합니다. "예산 절감".


하지만 이 '창의적인 원가 계산'이 나중에 국가에게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서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1. 내규(예규)를 어겨도 배상 책임은 없다? (반은 맞다)

대법원 판례(2013다23617)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담당 공무원이 기획재정부의 「예정가격작성기준」을 지키지 않고, 표준품셈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기초금액을 산정했습니다.

법원은 먼저 공무원의 편을 들어주는 듯합니다.


"원가 계산 기준은 공무원 내부 지침(내규)일 뿐이다. 이걸 좀 어겼다고 무조건 배상 책임을 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진짜 판결은 그다음 문장부터입니다. "그러나..."


2. 예측 불가능한 '후려치기'는 유죄다

법원은 국가 계약의 '신의성실 원칙'을 강조합니다.

입찰에 참여하는 업체들은 당연히 "국가가 표준품셈과 기준에 맞춰서 적정하게 가격을 산정했겠지"라고 믿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공무원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합리적인 범위를 넘어서 가격을 '왕창' 깎아버렸다면? 이건 업체의 뒤통수를 치는 기망 행위입니다.


판례는 이렇게 말합니다.

"표준품셈 기준을 현저히 벗어난 방식으로 산정했으면서,

입찰 공고에 이를 알리지 않았다면 국가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즉, 예산을 아낀답시고 몰래 깎은 돈을 이자를 쳐서 물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살길은 오직 하나, '이실직고(고지의무)'

그렇다면 예산이 부족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공사를 포기해야 할까요?

법원은 '고지의무'라는 탈출구를 알려줍니다.

만약 현장 여건상 품셈보다 적게 들어갈 것이 확실하거나, 예산 사정으로 감액이 불가피하다면, 입찰 공고문에 대문짝만하게 써놓으라는 겁니다.


"※ 본 공사의 기초금액은 예산 사정상 표준품셈의 80% 수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입찰 참가자는 이를 숙지하고 투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써놨는데도 업체가 들어와서 계약했다면? 그건 알고도 들어온 거니(위험 인수),

나중에 딴소리를 못 합니다.

하지만 숨기고 깎았다면? 그건 국가 책임입니다.

작가의 이전글현장소장님의 보험료는 왜 정산해 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