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무슨 예방접종 후 난리가 났어요...
은찬이 인지수업이 끝나기 직전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수업이 끝났느냐고 물으셨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엄마가 차로 우리를 데리러 오셔서는 집에 내려주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은찬이를 데리고 은찬이 할머니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곧 있을 엄마아빠의 결혼기념일이 생각났고 조카를 데리고 서프라이즈를 해보기로 했다. 가능할지 안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시도해보기로 결심을 한다.
조카가 할머니에게 말을 할 당시 기분이 조금 안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와서 든다. 감각통합 수업전 언어수업 대기실에서 책을 함께 읽었다. 책 내용은 크루즈 안에서 쥐돌이 두 마리가 역시나 쥐인 '레옹삼촌'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야기. 배 갑판부터 선장실, 미용실, 식당, 의료실 등등을 돌아다니는데 결국은 배의 맨 밑칸 화물칸에서 레옹삼촌을 찾으며 끝나는 그림책이다. 대신 그 그림책에 각 칸마다 동물들이 있다. 아이들은 동물들이 몇 마리 있나 맞추는 식으로 숫자를 재밌게 배울 수 있다. 은찬이는 이 그림책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동물들을 하나하나 세가며 악어가 네마리 있어, 코끼리가 한 마리 있어, 쥐가 열마리 있어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재밌어한다.
그 날은 감기가 도는 요즘을 대비해 은찬이 예방접종을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함께 보며 동물들 숫자를 세며 놀고 있는데 우연히도 그림책 크루즈 속 의료실에 주사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사기를 보며 나는 은찬이에게 미리 넌지시 암시를 해놨다. 은찬이는 이제 형아라서 주사 안 무섭지? 주사 맞으면 주사 잘 맞을 수 있지? 그랬더니 은찬이가 응 잘맞아 라고 말했다. 녀석, 앞으로 다가올 검은 그림자는 알지 못하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수업이 끝나고 나서 병원이 있는 6층으로 함께 내려가 어리둥절 왜 여기 왔지 하는 은찬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인지수업 전 진료 예약을 하고 갔기 때문에, 보호자 동의서류를 낸 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주사 맞을 차례. 의사선생님이 계신 진료실로 들어간다. 은찬이는 그 때까지도 상황파악이 덜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과 의사선생님이 분주히 움직이시면서 은찬이 옷 팔 부분을 벗기시고 그러시자 녀석이 이게 뭐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사 선생님이 잠깐 아파요 이러면서 주사로 꾹 누르시는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울지 않았다. 정말이지 안 울었다. 아프지 않았나보다. 아니다. 아팠는데 어리둥절 영문도 몰라서 울 타이밍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의사선생님들이랑 간호사 선생님은 씩씩하다고 칭찬을 엄청 많이 해주셨다. 그리고 비타민도 세 개나 주시고 말이다.
녀석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당황스러움? 이런 것이었을까? 어쨌거나 나는 녀석과 함께 병원에서 나와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를 기다리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될게 없었다. 할머니가 온다고 하면 녀석이 더 좋아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 있을 부모님 결혼기념일 생각이 다시 났다. 일층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무인꽂집을 보자마자 일단 들어가서 결제했다. 주황색 분홍색이 은은하게 도는 장미꽃이었다. 너무 올드한 느낌의 꽃은 고르지 않기로했다. 엄마도 그 편을 좋아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꽃집에서 꽃을 결제하고 나서 나는 은찬이에게 연습을 시켰다. 은찬이는 할머니 결혼기념일 미리 축하해요. 이걸 세 번 연습했고 세 번 다 실패했다. 그래서 할머니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이걸로 줄여봤다. 그랬더니 한 번 연습하니 되긴됬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위한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할머니 만나면 꽃 드리면서 이렇게 말하는거야 연습을 시켰고 할머니가 곧 오셨다.
그.런.데.
할머니의 차에 뒷자석에 은찬이가 먼저 타고 내가 상석에 앉았다. 할머니 바로 뒷자리에 앉은 은찬이 자리에는 엄마가 둔 짐이 좀 많았다. 내가 미리 치워줬어야 하는데 생각을 못했던거다. 축하해요라는 말은커녕 불평을 하는 은찬이 옆에서 내가 대충 짐을 치워주는데... 녀석이 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할머니한테 갑자기 유턴을 하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유턴이 안되는데. 그래서 '엄마 직진직진'이라고 내가 말하자 갑자기 난리가 난 것이다. 소리를 꽥꽥 지르고 울면서 대성통곡을 하는데... 할머니 결혼기념일 축하해요는커녕 할머니 싫어 이모 싫어 이러고 난리가 났다.
그렇다. 어쩌면 녀석은 억울했는지도 모른다. 이런식으로 얼렁뚱땅 주사 맞추는 거 말도 안해주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려고 한 이모도 어이없고 할머니가 데려왔는데 뒷자석에 말도 안되게 짐도 많아서 자기를 환대해주는 느낌이 없었던 게 괘씸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유턴하고 싶은데 직진을 하라는 이모가 아무래도 미워보였나보다.
은찬아. 그래도 주사는 맞아야지 어쩌겠니. 나 좋으라고 맞니. 나 좋으라고 이모도 악역을 맡아서 할까. 너 감기 자꾸 걸리고 그러니까 이참에 맞았지 이녀석아. 집에 와서 할머니랑 놀고 하면서 좀 안정은 됬지만 녀석은 집에 오는 길 내내 서럽게 울었다.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짜식아 말이야. 할머니를 위해서 준비한 이벤트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이다. 그래도 녀석도 억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카야 이번만 그런게 아니야. 다음에 8세 되기 전에 맞을 주사가 두 번이나 더 남았단다. 이제는 주사 안 맞을거란 너의 말에 주사 안 맞아도 된다고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어른이 되니 거짓말을 하게 되는 구나. 거짓말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는 이모도 어쩌다보니 거짓말을 하게 되는구나. 거짓말이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는구나. 세상에 선도 악도 없고 그 중간도 없고 그냥 아무 경계도 없었다면 이런 생각을 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세상속에 어쨌든 이모가 살고 있네. 은찬아. 그래, 이모가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다음에 주사 맞히러가는 악역은 또 이모일거라고 생각을 해본다. 참 거짓말을 너무 싫어하는 이모도 세상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네.
그리고 녀석은 그날 뚱했지만 엄마가 오고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엄마가 최고인가보다. 이모는 사실 이러면 조금 서럽다. 그래도 어찌저찌 이렇게 하루가 또 지나간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또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남긴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