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cm의 무게 #3

by 미녕


진료를 잘 보는 곳임이 틀림없었다. 도착하니 병원 대기실은 이미 만원이다. 평일 낮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대부분 어르신으로, 모두 이 병원에 여러 번 오신 듯 편안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다. 신참자는 기가 죽어 대기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호명되기를 기다린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만 솟아오른 아랫배의 이유가 궁금했을 뿐, 진단이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당장 감기나 몸살처럼 쉬이 추측해 볼 만한 구체적인 병명도 없었다. 사무실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좋았다.

4월의 이른 더위와 대기실을 채운 사람들이 엮어내는 소음, 길어지는 기다림에 슬슬 지루함이 몰려온다. 허가받은 단 2시간의 외출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에 마음이 조급하다. 여유를 찾으려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출근길 들었던 음악을 이어 듣는다. 머리통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경쾌한 음악 소리에 손과 발이 들썩이지만, 겨우 일으킨 흥이 무색하리만큼 눈앞의 광경은 한치 변함이 없다. 경직된 표정의 낯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겸연쩍음에 자연히 자세가 공손해졌다. 오히려 사무실에 있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며 업무 회피에 대해 짧은 반성을 해본다.


몇십 분이 지났을까, 간호사의 부름을 받고 진료실로 들어가니 단발머리를 한 인상 좋은 선생님이 앉아계신다. 친절함까지 갖추신 선생님은 내원한 이유와 최근 몸 상태에 관한 몇 가지의 질문을 하셨다. 그에 아랫배가 튀어나와 이상함을 느꼈으며 별다른 증세는 없다 간략히 대답하고, 초음파를 받았으면 한다 전했다.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 호흡을 참으며 차가운 청진기를 견딘다. 곧바로 옆 검사실로 이동해 검사대 위에 누웠다.
나온 배는 누워있을 때 더욱 도드라졌다. 차가운 젤을 뿌리고 초음파 기계를 갖다 댄다. 화면에 무엇인가 나타날 것이고 곧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계적이라 보일 만큼 검사 과정에 군더더기가 없던 선생님은 갑자기 박자를 놓치고 만다. 초음파를 통해 비치는 화면을 보고는 좀 더 빠르게 움직임을 전환한다. 선생님의 전환태세에 검사실의 공기도 따라 변했다. 분명 당황하는 눈치다. 기계에 묻는 젤을 닦아내며 마무리하는 동작이 빨랐다. 그때 처음으로 겁이 났다.

진료실에서 다시 마주한 선생님은 뜬금없이 내과에 대한 정의를 알려주신다. 내과는 폐, 간과 같은 장기들에 이상이 있을 때 자세히 진료를 할 수 있는 곳이란다. 나는 하복부에 혹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정확한 진료를 볼 수 없으니 여성 전문병원으로 가보는 것이 좋겠다 하셨다. 진료 의뢰서를 써주셨고, 초음파 검사 결과를 CD에 담아주셨다. 처방전 하나쯤 들고나올 줄 알았던 두 손에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들려있다. 모든 박자가 벅차게 빠르다. 그 흐름에 밀려 내 마음도 초조해진다. 남은 외출 시간을 확인할 새도 없이 휴대전화를 켰다. 초행길을 흔쾌히 나설 수 없는 모자란 운전 실력에, 타고 온 차는 내과 주차장에 두기로 한다. 떨리는 손으로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를 찾았다. 자주 지나쳤던 거리가 뒤죽박죽 뒤섞인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당황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다행히 내과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꽤 큰 규모의 여성 전문병원이 있다. 뛰는 듯 걸어 병원에 도착했고, 당장 진료가 가능한 의사 앞으로 대기를 걸었다. 여성 전문병원답게 대기실은 여성으로 가득하다. 반절은 임산부다. 가만 보니 복도 한쪽 끝에 조리원으로 통하는 문이 나 있다. 출산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인가 싶어 못 미더운 마음이 들었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알아볼 걸 그랬나, 병원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 대기 시간이 짧은 의사라니 실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을 잔뜩 품은 후회로 골이 아파온다.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하나 진실로 망설이던 중 이름이 불렸다. 하는 수 없이 진료실에 들어가 나이 지긋한 선생님을 만났고, 내과에서처럼 문진이 시작됐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했다. 비슷한 증상의 환자들을 많이 봤던 것인지,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며 혹이 생긴 것이라 진찰하지 않고 진단하는 내공을 보여주셨다. 원래 있던 것이 부어오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생겨나긴 생겨난 모양이다. 뱃속에 뭔가 있구나 싶어 괜히 아랫배를 짚어본다. 그나저나 내과 의사를 당황하게 한 증상을 웃어넘기는 경험치라니, 의심을 지우고 숙련된 그를 믿어봐야겠다. 별거 아니구나 싶어 안심이 됐다.


짧은 초음파 검사를 마쳤다. 이곳 진료실의 책상은 내과 진료실의 것보다 크고 색이 짙다. 선생님은 머뭇거리며 입을 여셨다. 배려 차원으로 빙빙 돌려 말씀하셨지만 결국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라는 이야기다. 어떤 대꾸를 할지 몰라 멍하니 선생님을 바라본다. 눈빛이 부담스러웠던지 선생님은 옆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로 조용히 눈길을 옮기신다. 아무 말 않는 나 때문에 더 곤란하셨을 테다. 숙련된 의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어색한 기류 속에서 당황한 기색만이 역력하다. 나와 같은 증세는 처음 보신 것일까.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말과 함께 황급히 진료가 마무리된다. 정확한 진단도 없다. 조금 전 내과보다 급하고 야박하다. 나는 내쳐졌다. 물론, 모두 기분 탓이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는다. 진료 의뢰서를 받기 위해서다. 진료 의뢰서는 효력이 2주밖에 없으니 꼭 기간 안에 병원을 찾아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다시 이곳에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주의도 함께 들었다. 대기실은 여전히 산모들이 가득하다. 그들이 서 있는 세상이 진료실을 들어서기 전보다 멀게 느껴진다. 혼자 있으니 더욱 혼자가 되었다.


진료 의뢰서를 전달받았다. 빳빳한 종이 위엔 검은 글자가 가득하다.


‘악성 신생물 생성’


알고 있던 단어들의 새로운 조합. 무슨 말인지 얼른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는다. 구겨질세라 종이를 두 번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복도 끝 화장실로 갔다. 왈칵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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