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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원 Feb 16. 2016

리버풀, '놈코어(Normcore)' 클롭을 입다

‘보통’을 부각하는 시대다. 슈퍼 노멀(SUPER NORMAL)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우수한 성능을 강조하는 동시에,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노멀)’나 탈 수 있음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어느 자동차 광고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개가 톡톡 튀는 색상과 디자인을 선호하던 패션계의 트렌드가 오늘날엔 평범함 속에서 멋을 추구한다는 '놈코어(Normcore= Normal+Hardcore) 패션'을 지지하고 나선 것 역시, 이제는 보통이 세상의 중간에서 앞으로 포지셔닝 했음을 보여준다. 바야흐로 ‘보통 전성시대’의 도래다.

최고들만이 모인다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 스스로를 ‘노멀’이라 자처한 사람이 등장했다. 191cm 의 건장한 체격(체격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에 한국 나이로 50세가 채 되지 않은 젊은 신임 감독의 이 한 마디는 유럽 축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도르트문트의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후 줄곧 거처를 저울질해오던 위르겐 클롭이 마침내 리버풀의 심장 ‘안필드’를 새 보금자리로 택했다. Kop(콥:리버풀 팬)과 Klopp, 이 얼마나 절묘하게 어울리는 만남인가.

# Normal? -> Supernomal!            

“나는 평범하다”라는 말은 감독 취임사가 아니라 선수 시절 인터뷰로 더 어울렸을 법하다. 클롭은 독일의 FSV 마인츠05에서 11년간(1990~2001) 선수 생활을 한 ‘원클럽맨’이다. 95/96 시즌 스트라이커에서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클롭은 당시 2부 리그 소속 마인츠에서 총 337경기에 출전해 52골을 득점했다. 이름만 들어도 현역 시절의 활약상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여타 선수 출신의 감독들과 비교했을 땐 지극히 평범했던 보통의 선수였다.

2001년 선수 은퇴 후 클롭은 곧장 친정팀 마인츠의 감독으로서 지도자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만년 2부 리그 팀이었던 마인츠를 03/04 시즌 1부 리그로 끌어올렸으나 2007년 다시 강등의 아픔을 맛봤다. 책임감을 갖고 한 시즌 더 마인츠에 잔류했지만 다시 1부 리그로 올라서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진해서 이적을 요청했고, 전통의 명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적을 옮기게 된다.

악화된 재정난(바이에른 뮌헨에 돈을 꿔야 할 정도)과 주축 선수들의 전력 이탈 등으로 중·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이 돼버린 도르트문트를, 클롭은 단 세 시즌 만에 독일 최고의 팀으로 다시 세웠다. 부임 첫해 펠리페 산타나, 네벤 수보티치를 시작으로 마크 훔멜스, 케빈 그로스크로이츠, 루카스 바리오스, 루카스 피스첵, 카가와 신지,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등 각지의 전도 유망한 재능들을 적은 이적료로 데려와 최고의 선수들로 키워냈다.            

클롭은 장성한 ‘클롭의 아이들’에게 압박 축구의 정립자 아리고 사키의 ‘사키이즘’과 궤를 함께하는 자신의 축구 철학까지 고스란히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완벽한 탈태(奪胎)를 선보인 클롭의 도르트문트는 결국 10/11 시즌 바이에른 왕조를 무너뜨리고 꿈의 마이스터 샬레(분데스리가 우승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후 11/12 시즌 한 번 더 분데스리가 정상에 오른 도르트문트는 12/13 시즌 마르코 로이스 등을 영입하며 한층 더 견고한 전력을 구축했고, 강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오르며 이른바 ‘꿀벌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 리버풀, 클롭을 입다           

ⓒ 리버풀 공식 홈페이지 캡처

승점 84점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근접했던 13/14시즌을 끝으로, 무색무취의 평범한 팀으로 전락해버린 리버풀은 15/16 시즌 에버턴과의 머지사이드 더비 무승부를 기점으로 브랜든 로저스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 경질된 로저스 감독의 후임으로 안필드에 입성한 클롭은 부임 후 가진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부터 수많은 어록을 탄생시키며 팬들의 기대를 한껏 고조시켰다. 부임 후 처음 세 경기 동안 승리가 없었지만(3무) 시간이 갈수록 클롭의 축구 철학은 리버풀 선수들의 발끝에 녹아들기 시작했고, 클롭의 리버풀은 최근 리그 12라운드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당한 1패를 제외하곤 단 한차례의 패배도 없이 자신들의 축구를 구현하고 있다.

특히 부임 후 첫 경기이었던 토트넘과의 EPL 9라운드 경기는 그동안 리버풀 축구에서 실종됐던 ‘절실함’이 진하게 묻어 나온 경기였다. 이 경기서 리버풀은 114.7km를 뛴 ‘젊은’ 토트넘을 상대로 더 많은 활동량을 보이며 (116km) 올 시즌 리그에서 최초로 토트넘보다 많은 활동량을 기록한 팀이 됐다. “내 팀은 매 경기 전속력으로, 한계치까지 뛰어야 한다”라는 클롭 감독의 첫 인터뷰가 진하게 오버랩되는 결과였다.            

ⓒ 리버풀 공식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클롭 에게도 넘어야 할 산은 있다. 이미 로저스 시절부터 문제로 지적된 이적 위원회(마이클 고든, 이안 에어 등 FSG(Fenway Sports Group) 보드진 5명과 리버풀 감독으로 구성됨)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알력(軋轢)’을 얼마나 최소화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명가 재건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실제로 수아레스와 스털링의 이적으로 발생한 거액의 이적료를 재투자하는 과정에서 전 감독 로저스는 이적 위원회와의 의견 충돌로 인해 원하는 선수 대신 다른 선수를 영입하기도 했다. 머니볼(Moneyball)1)의 철학을 축구에 이식하겠다는 ‘이성’의 FSG와 인간적 풍미가 물씬 느껴지는 ‘감성’의 클롭은 언뜻 보면 지극히 상극 인듯 보이지만 도르트문트 시절 초어크 단장과 환상의 케미를 발산하며 수많은 ‘클롭의 아이들’을 키워냈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클롭 만큼 이적위원회와의 ‘밀당’을 잘해 낼 사람도 없어 보인다. 분데스리가의 ‘단장-감독’ 이원화 체제에서 누구보다 눈부신 업적을 이뤄냈던 클롭은 이적 위원회라는 독특한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리버풀에겐 맞춤 정장과도 같은 존재이다.

# "I'm the normal One."

클롭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2015년의 리버풀은 ‘클롭 전성기’의 서막을 알렸던 도르트문트 시절과 닮은 점이 많다. 전통의 명가에서 보통의 팀으로 전락했던 도르트문트처럼 지금의 리버풀 역시 유럽 대항전 진출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팀으로 그 위상이 추락했을뿐 아니라 '잠재력'을 가진 선수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것도 비슷한 점이다. 휴식기 내내 리버풀보다 객관적인 전력상 우위로 평가받는 구단들이 보낸 구애를 뿌리치고, 클롭이 리버풀을 택한 이유 역시 이러한 ‘잠재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완성된 팀을 운영하는 관리자보단 자신의 방식으로 팀을 만들어나가는 ‘창조자’에 가까운 클롭은 지금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미완성의 선수들을 다시 한 번 ‘클롭의 아이들’로 키워내고 싶었고, 이러한 요건을 모두 갖춘 팀이 바로 지금의 리버풀이었던 것이다.            

[T.P.O]2) 라는 패션의 기본 원칙을 적용해도 지금 이 시기, 리버풀에게 클롭 만큼 어울리는 옷은 없을 것 같다. 15/16 시즌 옷을 갈아입은 리버풀은 아직까지 새 옷의 빡빡하고, 거친 소재에 완전히 적응하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맛깔나게 새 옷을 소화하고 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클롭 이라는 옷은 다른 화려한 철학을 담은 그것들 보다 볼품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엔 화려함을 능가하는 ‘멋’이 담겨있다. “상대가 우리보다 뛰어나면, 그들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면 모든 팀을 이길 수 있다”라는 클롭의 말은 어쩌면 지극히 평범했던 선수 시절부터 터득해온 자신만의 진리일지도 모르겠다. 황새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일관된 방식으로 한 발 더 뛰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절실함만이 평범한 ‘뱁새’가 황새를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말하는 클롭의 ‘멋’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놈코어’가 아닐까? 15/16 시즌 위르겐 클롭과 리버풀이 만들어나갈 새로운 런웨이를 응원한다.


1) 미국 프로야구 오클랜드의 빌리 빈 단장이 주장한 야구단 운영 기법. 통계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저비용, 고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 .

2) 옷을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따라 알맞게 착용해야한다는 기본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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