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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원 Sep 28. 2020

축구의 추억

러닝타임(running time) : 영화와 드라마의 상영 길이를 시간으로 나타낸 단위.
축구 : 11명의 ‘뜀박질’이 만드는 한 편의 영화 혹은 일련의 드라마. [편집자 주]

“논두렁에 꿀 발라놨나?”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논두렁 신’의 대미는 송강호의 애드리브(즉흥대사)가 장식한다. 쇼트(한 번에 촬영한 장면)를 길게 찍는 ‘롱테이크(long-take)’ 기법이 사용된 이 논두렁 신에서 카메라는 약 3분간 멈추지 않고 주인공 송강호의 뒤를 쫓는다. 배우들이 적재적소에 곁들이는 애드리브가 영화에 풍미를 더 한다. 화면의 분할 없이, 배우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에 관객들은 동화되고, 자신이 마치 논두렁을 걷는 듯한 일체감을 느낀다.

전·후반 단 2컷으로 이루어진 축구는 롱테이크의 미학이 가장 잘 구현된 스포츠다. 축구 경기는 전반전이 끝나고 하프타임에 딱 한 번 멈춘다. 경기 중 파울이 발생하면 잠깐 서기도 하는데, 이마저도 ‘어드밴티지 룰’을 적용해 흐름을 살린다. 카메라는 공을 따라 쉴 틈 없이 움직이고, 관중의 시선도 공의 흐름 속에서 유영(遊泳) 한다.

이닝(inning), 쿼터(quarter), 홀(hole)... 갖가지 슬레이트에 의해 재단되는 다른 장르들보단 덜하지만, 최근 축구도 조금씩 쪼개지는 모양새다. ‘선수들의 안전’, ‘공정한 판정’을 위한다는 각종 제도가 축구의 롱테이크 신이 발산하는 매력을 위협하고 있다.

2014 브라질월드컵 네덜란드와 멕시코의 16강전에서 네덜란드의 루이스 판 할 감독은 후반전 주어진 ‘쿨링 브레이크’를 작전타임으로 활용했다. 멕시코에 0-1로 끌려가던 판 할 감독은 고온의 날씨에 선수들의 수분 섭취와 휴식을 보장하는 ‘쿨링 브레이크’ 시간을 활용해 전술 변화를 지시했고, 결국 2-1 역전승을 일궈냈다. 경기가 끝난 뒤 판 할 감독은 “우리는 물을 마시는 휴식 시간을 통해 전술을 수정했고, 이후 많은 기회를 만들어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 최근 축구계 화두인 비디오 판독 시스템 / 사진: FIFA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최근 축구계의 화두인 ‘비디오 판독(Video Assistant Referee)’ 시스템 역시 축구를 잘게 쪼개는데 일조하고 있다. 주심은 골, 페널티킥, 레드카드 등 경기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에서 경기를 멈추고 비디오 리플레이를 판정에 활용할 수 있다. 경기의 흐름 때문에 도입을 주저했던 국제축구연맹(FIFA)도 최근 각종 대회에서의 비디오 판독 시범 운영을 늘려가는 추세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비디오 판독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테스트 결과 비디오 판독 시스템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며 비디오 판독 도입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했다.


영화에서 쇼트가 쪼개지면 감독의 권력은 극대화된다. 장면 사이사이 감독의 개입은 늘어나고, 잔소리는 ‘사사건건’이 된다. 반면 롱테이크라는 확장된 시·공간 속에서의 감독은 함부로 작품에 끼어들 수 없다. 촬영이 도중에 중단되면, 처음부터 그 신을 다시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롱테이크 하에서 감독은 배우가 자신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수행해내기만을 바라는 수동적 존재로 변모한다. 때로는 예측 가능한 대사보다 배우의 재치 있는 한 마디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배우가 대본의 대사 대신 애드리브를 쳐도 촬영의 흐름을 끊지 않는다.            

▲ 배우 송강호(좌)와 변희봉은 3분짜리 롱테이크 신에서 신들린 애드리브를 주고받으며 장면의 완성도를 높였다. / 사진: 영화 [살인의 추억] 갈무리

축구 감독은 경기 시작 전과 하프타임에 지시사항을 전달한다.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축구 감독은 경기와 관련해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터치라인 밖에서 지시를 내릴 수 있지만, 드넓은 운동장에서 선수들이 감독의 목소리를 온전히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롱테이크로 촬영되는 45분짜리 쇼트 안에서 선수들이 전술을 제대로 구현해내기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존재가 축구 감독이다.


축구 전술이 고도화되기 전에는 팀의 조직력보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 전술이 주류를 이뤘다. 과거 전술과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플레이를 선보였던 '판타지스타(Fantasista)' 로베르토 바조의 예측 불가능한 플레이는 축구가 얼마나 극적이고 영웅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반면 현대축구의 전술은 조직력을 강조한다. 이러한 기조 속에서 비디오 판독 등을 멍석 삼은 감독이 경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선수의 재량과 창의성은 더욱 홀대받을 수밖에 없다.

배우가 그저 대본만 충실히 읊는다면 축구는 점점 무미건조하고 의외성이 결여된 장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경기가 중단되는 시간이 짧아서 긍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고 혹자는 주장하지만, 나중에 광고까지 붙어 경기의 흐름이 완전히 토막 난다면 축구는 축구만의 매력을 상실한 ‘점수 안 나는 발야구’나 다름없을 것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지난해부터 K리그는 경기 지연 시간을 줄이기 위해 경기구와 볼보이 수를 대폭 늘리고, 선수 교체 시 아웃되는 선수가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라인으로 퇴장하게 했다. 골키퍼가 골킥을 6초 안에 처리하는 ‘6초 룰’을 강화했고, 노골적으로 시간을 끄는 이른바 ‘침대축구’ 행위에 대해서도 엄격한 판정을 내렸다. 그 결과 지난 시즌 9월을 기준으로 실제 경기 시간(Actual Playing Time)이 2분 18초가량 늘었고, 경기당 득점은 0.32골 증가했다. 후반전 추가시간 터진 이른바 '극장골'도 전 시즌에 비해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축구의 45분짜리 롱테이크 신이 쪼개져선 안되는 이유다.  


“어떤 상황, 순간, 부분들은 반드시 샷을 나눠선 안 된다는 믿음이 있다. 꼭 그렇게만 찍어야겠다고 집착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다. 사체가 발견되는 논두렁 신이 그랬다. 온종일 연습해서 찍은 3분짜리 롱테이크 장면으로 관객들을 80년대 살인 사건의 현장으로 데려다 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살인의 추억] 봉준호 감독-

'흐름'과 '몰입'의 스포츠인 축구도 쭉 '롱테이크'로 가야 되지 않을까.


2017년 5월 12일자로 베프리포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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