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댄스 시퀀스부터 화려한 군무와 노래(Another Day Of Sun)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역동적인 군무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61)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찬이 가로등 기둥을 잡고 손과 발을 벌리는 장면에 ‘사랑은 비를 타고’(1952), 두 사람이 탭댄스를 추는 장면에 ‘톱 햇’(1935)이 은은하게 녹아있다. 국내 누적 관객 수 3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라라랜드’(2016)에 담긴 ‘오마주’들이다.
오마주(hommage)는 '존경'의 의미를 갖는 프랑스어다. 영화에서 특정 작품의 장면 등을 차용해 해당 작가나 작품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뜻한다. 원작 속 장면을 그대로 넣을 수도, 특정 부분이나 분위기만 참고할 수도 있다. 영화 용어지만 최근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용된다.
지난 주말 있었던 토트넘 홋스퍼와 위컴 원더러스의 잉글리시 FA컵 32강전은 2010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서 펼쳐졌던 어느 한 경기와 절묘하게 포개졌다. 마치 오마주를 보는 것처럼.
2010년 11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은 울버햄튼 원더러스와의 EPL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에브라, 퍼디난드, 비디치 등 노련한 선수들이 수비진에 포진했지만 오베르탕, 치차리토와 같은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수들이 공격진을 구축하면서 고전이 예상됐다.
초반부터 맨유의 허리가 삐걱 됐다. 박지성과 함께 어린 선수들을 이끌어야 할 하그리브스가 부상으로 5분 만에 실려 나갔다. 노숙자 출신으로 맨유에 입단해 화제를 모았던 베베가 하그리브스 대신 들어왔지만 존재감은 없었다. 맨유는 당시 리그 전 경기에서 골을 허용한 울버햄튼을 상대로 전반전 45분이 지나도록 골을 만들지 못했다.
맨유에는 박지성이 있었다. 측면과 중앙을 넘나들며 경기를 조율한 박지성이 총대를 메고 페널티 박스 안으로 침투했다. 전반 45분경 플레처의 스루패스를 받은 박지성이 침착하게 오른발로 선제골을 뽑았다.
박지성의 골로 한숨 돌린 맨유는 후반 20분 이뱅스 블레이크에게 동점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퍼거슨 감독은 오셰이 대신 스콜스를 투입해 중원을 강화했고, 베베를 빼고 마케다를 넣었지만 이렇다 할 효과는 없었다. 정규시간이 모두 흐를 때까지 올드 트래포드의 전광판 숫자는 1-1이었다.
위기의 순간, 맨유를 구한 건 박지성이었다. 후반전 추가시간 2분경 오른쪽 측면서 공을 받은 박지성이 박스 안까지 진입한 뒤 수비수 한 명을 벗겨냈다. 평소 이타적인 플레이가 몸에 밴 박지성이 패스를 내줄 법 했지만 ‘내가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수비수 2명을 앞에 두고 날린 박지성의 왼발 슛이 그대로 골망을 갈랐다. 경기 결과는 맨유의 2-1 승리.
4부 리그 위컴을 만난 토트넘은 부상자들의 회복과 주전들의 체력 안배를 위해 로테이션을 가동했다. 평소 리그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던 후보 선수들이 대거 선발로 나섰다.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 중 주전급 기량을 갖춘 선수는 손흥민이 유일했다. 최전방에 포진한 손흥민이 토트넘의 공격을 책임졌다. FA컵 대진 추첨식에서 토트넘이 상대로 결정되자 뛸 듯이 기뻐했다는 위컴은 전반 23분 터진 헤이스의 선제골로 앞서가더니 이내 추가골까지 보태며 토트넘을 몰아세웠다.
토트넘에는 손흥민이 있었다. 전반부터 분주히 위컴의 골문을 두드린 손흥민은 후반 15분 페널티박스 왼쪽 사각에서 강력한 왼발 슛으로 만회골을 뽑아냈다. 토트넘의 포체티노 감독은 뎀벨레와 알리를 투입해 추격의 불씨를 지폈다.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했다. 화이트 하트 레인의 전광판 숫자는 3-3이었다. 그대로 끝나면 위컴의 홈에서 재경기를 치러야 하는 상황. 리그에서 치열한 선두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토트넘에게 재경기는 패배만큼 쓰라린 결과였다.
위기의 순간, 토트넘을 구한 건 손흥민이었다. 후반전 추가시간이 다 지난 시점에 손흥민이 박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늘 그렇듯 '내가 결정짓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얀센과 원투패스를 주고받은 손흥민이 회심의 오른발 슛을 날렸다. 공은 수비 맞고 그대로 골문을 향했다. 경기 결과는 토트넘의 4-3 승리.
올 시즌 손흥민은 11골을 넣으며 ‘우상’인 박지성이 잉글랜드 무대서 세운 한 시즌 최다골(8골)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해 아시아 최초 EPL 9월의 선수로 선정된 손흥민은 이제 기성용의 EPL 한 시즌 최다골(8골) 기록에 단 1골만을 남겨두고 있다.
같은 듯 다른 것이 오마주의 묘미다. ‘라라랜드’ 주인공들의 앙증맞은 탭댄스가 ‘쉘 위 댄스’(1937)의 그것과 닮았지만, 촬영지인 그리피스 파크(LA)에서 어느 특정 날짜와 시간대에만 볼 수 있었다는 신비로운 석양은 오직 ‘라라랜드’에만 있다. 박지성을 보며 꿈을 키웠다는 손흥민의 또 다른 오마주(Another Day Of Son)가 기대되는 이유다.
베프리포트 2017년 2월 1일자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