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고아가 되던 네 살의 기억이 없다. 그 시절의 나를 대신 기억해 주는 것은, 양아버지가 보육원에 남기고 간 짧은 말들과 1년 전 우연히 만나게 된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이다. 그 조각난 증언들을 더듬어 빈칸처럼 남아 있는 시간을 기록해 본다.
이 글은 지금은 50대가 된 양아버지가 나를 보육원에 두고 떠나며, 지금의 가족과 보육원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지인에게 전달한 이야기다.
양아버지는 자신이 사랑했던 친모와 함께 나를 4년간 키워왔다. 그러나 친모는 나를 낳고도 거의 돌보지 않았고, 준비되지 않은 20대 청년은 거의 홀로 나를 키워야 했다. 그의 부모님, 즉 나의 양조부모가 조금씩 육아를 도왔지만, 양아버지의 손에는 늘 서툼과 버거움이 묻어 있었다. 그는 신생아였던 나를 품고, 자주 라면을 끓여 먹이며 길렀다. 나는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이 창백했고, 밤이면 기침을 자주 하던 아이가 되었다. 양아버지는 처음 나를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친딸이라 믿었지만, 4년이 지난 뒤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아직 자신도 어른이 되지 못한 상태로 나를 키웠을 것이다. 보통 20대 청년이 그렇듯 자주 먹는 라면으로 나와 함께 한 끼를 때우셨을 것이다. 그에게 육아는 귀찮음과 애씀 사이 어딘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서툰 손길 안에서도 나를 챙겼던 것은 내가 그의 ‘딸’이라는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혼란 속에서 친모도 돌보지 않는 내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 해방감을 느끼셨을까, 슬픔을 느끼셨을까. 가끔 상상을 해본다. 그 순간부터 양아버지의 마음속에서는 사랑과 책임, 그리고 벗어나고 싶은 삶이 서로 부딪히며 자꾸만 삐걱거렸을 테니 말이다.
“친모도 돌보지 않는 아이야. 이제 너도 네 인생을 살아야지.”
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고 했다. 그 말은 못을 박듯 양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때 양아버지는 나를 보육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양아버지가 어떤 보육원에 나를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때, 그가 다니던 교회 청년부에 당시 스무 살 남짓했던, 이 이야기를 전해주신 분이 다니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자라 단단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 보육원에 보내고 싶으셨다고 한다.
양아버지가 '네가 자란 보육원을 알려달라'라고 하셨을 때, 지인은 양아버지에게 자신이 자란 곳은 정말 시골이니 서울 보육원에 보내라고 조언하셨다고 한다. 자신이 자란 시골 보육원은 환경이 열악했다는 사실과 함께..
하지만 양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보육원이 자신이 믿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지어졌고, 북적이는 도시보다, 시골의 순박한 공기 속에서 내가 더 맑게 자라길 바랐던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이 있는 서울과 먼 곳에 보내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는 나의 손을 잡고 보육원 앞에 섰다. 어린 내가 울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오히려 울었던 것은 양아버지셨다고. 나를 두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서럽게 울며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4년 간 친자식처럼 키웠을 시간이 떠오르시지 않았을까. 미안함과 죄책감, 작은 부성애가 그를 슬프게 했을 것이다.
비록 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셨지만, 양아버지는 최선을 다하셨다고 생각한다. 그저 감사함만을 느낄 뿐이다. 친모도 나몰라라 했던 나를 직접 당신의 손을 잡고 보육원에 데려다주신 것이니까.
양아버지는 나를 보육원에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셨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곳에 정착하여 살고 계신다고. 가끔 한국에 올 때면 지인이 일하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가신다고. 나의 안부를.. 아주 가끔 물어보신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23년 12월에 알게 되었다. 추운 겨울에, 나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고, 공장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시기였다. 그래서 이 소식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도전 정신으로 똘똘 뭉쳤지만, 누군가에겐 이 버거운 삶을 털어 놓고 위로받고 싶었다.
그래서 연락처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금세 생각을 멈췄다. 지금의 어머니가 20년 넘게 나를 키우며, 입양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셨으니까. 어머니가 겪으셨을 불안과 조마조마함을 생각하면, 진실을 끝까지 캐묻지 않는 것이 지금의 가족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파헤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더 알고자 하지 않기로.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간절함이 남아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양아버지에게 직접 “감사하다”라고 전하고 싶다. 딱 한 번만이라도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분이 내게 준 시간과 울음과 사랑의 조각들을, 어떻게든 감사의 마음으로 전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만 간직한 채, 찾지 않으려 한다. 그저 이곳에 편지 한 장 남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혹시라도 이 편지가 전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양아버지께.
아버지, 저는 여전히 당신이 지어준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성만 바꿔 새로운 호적에 올랐지요. 하지만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해요. 다만 제 손을 잡고 보육원 앞에 섰을 당신의 모습을 상상할 뿐입니다. 떠나오며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고단한 삶에 참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태껏 스스로를 축복이 아닌 원망 속에 태어난 아이로 생각하며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펑펑 우셨다는 얘기를 듣고 아주 잠시라도 사랑에서 자랐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4년 간 키워주시고 눈물로 보육원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 따뜻한 품에서 자랄 수 있었어요. 끝내 다시 만날 수 없더라도,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4년 동안 저를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p.s 우연히 조관우의 겨울이야기라는 노래를 알게 되었어요. 처음 이 노래를 들을 때 어쩌면 이 노래가사가 그 당시 20대 청년의 마음이지 않을까, 감히 떠올렸습니다. 겨울이 되면 이제 이 노래를 꼭 듣게 되는 삶이 될 것 같아요.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분께 마음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낭만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내겐 잊혀지지 않는 겨울얘기가 있어
그 얘기속엔 두 여인이 나오고
추억의 노래가 흐르는 카페도 있고
아직도 나는 널 사랑하고
모두 들떠 있던 축제의 그날
그녀가 날 이끈 그 곳엔
아주 작고 어린 소녀가 날 보며
메리크리스마스 웃고 있었네
기억하나요 우리 사랑을
그땐 서로의 아픔을 함께 했었죠
이젠 무엇도 남아있지 않지만
하얀 눈 내리던 그날의 입맞춤은 기억해요
너를 갖으려던 나의 꿈들은
눈속 어딘가에 묻혔고
우리 셋이 함께한 그날의 파티는
세상 어느곳보다 따스했었지
돌아오는 길에 너의 뜨거운 입맞춤에
나는 하늘을 날았고
안녕하며 돌아선 내 머리 위엔
어느새 하얀 눈이 내려 있었지
기억하나요 우리 사랑을
그땐 서로의 아픔을 함께 했었죠
이젠 무엇도 남아있지 않지만
하얀 눈 내리던 그날의 입맞춤은 기억해요
나는 아직도 너를 잊지 못하고
지금도 이 길을 나홀로 걷고 있는데
너는 지금 그 어딘가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 사랑하고 있을까
기억하나요 우리 사랑을
그땐 서로의 아픔을 함께 했었죠
이젠 무엇도 남아있지 않지만
하얀 눈내리던 그날의 입맞춤은 기억해요
난 기억해요 난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