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의 꿈이다.

by 구가영


사진 출처 유튜브 요정식탁

배우 박정민이 한 프로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나를 때리면서 공부를 시켰다. 그때는 원망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내가 엄마의 트로피 였던 상황이었다. 선 봐서 결혼해 자식을 낳아보니 머리 가 나쁘지 않은 애가 태어났고 어떤 꿈이 있던 엄마가 꿈을 실현하지 못한 자아를 자식인 내게 투영했다. 엄마 자아는 어디서 실현하지? 같은 고민이 결국엔 ‘자식인 나라도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어 엄마 인생이 덜 슬프게 했어야 된다’로 이해가 되어 마음이 편해졌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박정민은 어릴 때 공부하라며 화내고, 때리고, 속 태우던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자신이 엄마의 꿈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식이 공부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꾸 자라는 기대감. 그 기대감 때문에 어머니가 자꾸 바라게 되고, 기대와 어긋나면 답답함에 화를 냈을 거라는 이해였다.




이 이야기로, 나도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은 엄마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도 불안하고 무서웠던, 엄마가 원망스러운 어린 시절이 있다. 엄마는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공부를 잘하지 말았어야지~ 엄마 기대하게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다 잘하니까, 엄마가 너 하나 제대로 키워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어”



…..



나는 뛰어나게 잘하는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초등학교 4학년을 맞이했다. 그러다 2학기 성적표가 나왔는데 내가 반에서 2등이라고 한다. 멋모르던 나도 2등이라니까 마냥 날뛰었는데, 자식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오빠들은 공부에 뜻이 없어 부모님은 산에며 들에며 나가 뛰어놀게 했다. 건강하고 착하게만 자라면 바랄 게 없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남은 자식이 2등이라니.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2등은




나는 입양아다. 엄마가 4살의 나를 입양하려 했을 때 주위에서 모두 반대했다고 한다. 친척들, 이웃들, 모두가 말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으로 입양했다.



그리고 엄마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선택했기에, 무의식적으로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입양은 여전히 편견의 대상이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 ‘남의 자식’이라는 시선 속에서 엄마는 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래서 내가 공부에 소질을 보였을 때, 엄마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성적 이상의 의미였던 것 같다.


‘봐라,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훌륭하게 자랄 수 있다.’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큰 희생을 치르고 내린 결정이니, 그 결정이 옳았다는 증거를 더 강하게 원하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엄마의 엄격함과 기대는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한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후 5학년이 되어서 시험 평균 점수가 90점 밑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 그동안 엄마의 “공부공부공부”에 겁이난 나는 하교 후 집에 걸어가는 내내 가슴을 벌렁거렸다. 어떻게 하면 파리채를 맞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엄마가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만 했다. 아직도 그때 집 계단을 올라가는 생각을 하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역시나 혼이 났으니까.



그리고 또다른 일화가 있다. 이 시절도 5-6학년이었는데, 엄마는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삼국지를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리곤 어느 주말, 내게 삼국지를 읽게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삼국지가 너무 따분하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느껴져서 정말 읽기 싫었다. 내가 왜 재미없는 그 삼국지를 읽어야하는지 이해도 못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엄마는 소리치며 책상에 앉으라 했다. 책을 던졌다.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외출을 다녀올 동안 다 읽어놓으라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결국 그날 삼국지를 다 읽지 못했고 엄마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꾸중을 들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그리고 6학년이 되었다. 마지막 겨울방학엔 중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학원에서 오전 10시에 가서 밤 10시에 돌아오는 루트로, 하루 12시간씩 공부했다. 점심, 저녁 도시락을 싸서 다녔으니 공부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중학교 배치고사 성적에서 전 과목 합쳐 1등급이 나왔다.



중학생이 되어 반장(실장)을 했다. 갓 입학한 나는 선생님과 지역내 명문 고등학교 입시 준비 상담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극심하게 불안했다. 중학교에 오니, 반 친구들이 모두 경쟁자처럼 보였다. 그들이 푸는 문제집은 뭔지, 어디 학원을 다니는지 노심초사하며 곁눈질로 찾기 바빴다.



이런 불안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너는 잘할 수 있어”라는 기대는 “너는 잘해야만 해”라는 압박으로 변질되기 쉬우니까. 당시 나는, 성적이 좋을 때만 인정받는다고 느껴 끊임없이 불안했다. 존재 자체가 아니라 성과로 사랑받는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되었고, 나는 엄청난 사춘기를 맞이했다. 공부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어쩌면 그 압박과 불안이 한계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


지독했던 나의 사춘기는 3년 동안 지속되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멈췄다. 그때서야 손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고등학교 졸업식엔 학년 우수상을 받고 졸업했다.



하지만 대학은 포기했다.

나의 꿈이 뭔지, 누구를 위한 삶인지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 등록금이며, 생활비며,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그래서 엄마는 아직도 대학 얘기가 나올 때면 눈물부터 보이신다. 나를 대학에 보내지 못한 그 절망이 여전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어, 지금껏 공부에 욕심내는 엄마를 그러려니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엄마가 공부에 극도로 예민했겠거니 하면서. 하지만 박정민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엄마도 꿈이있었고, 그게 나였다는 걸 알았다.



엄마의 자랑이고 엄마의 꿈을 내가 이룰 수도 있다는 그 기대감. 내가 채워줄 수 있었으니까.


엄마의 꿈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결혼한 후에도 사정은 달라지 않고, 제대로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못 해주는 마음이 찢어졌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웃들의 자식 자랑에 엄마는 얼마나 아팠을까.



유행처럼 번지던 ‘공부 잘하는 자식이 최고’였던 그 시대. 엄마도 자연스레 꿈이 생겼을 것이다. 엄마 세대는 자신의 꿈을 꿀 기회조차 없었을테고, 가난과 성차별 속에서 ‘어머니’라는 역할만 주어졌다. 그래서 자식이 유일한 꿈의 통로가 되었다. 자식의 성공이 곧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나는 더 특별했을 것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사랑으로 선택한 딸. 세상의 편견과 맞서 지켜낸 아이. 그 아이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나의 성공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 옳았다는 증명이었다.



이 사실을 이제서야, 서른이 넘어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도 나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죄책감에 눈물을 보인다. 나 잘살고 있다고, 스스로 길을 만드는 이 인생이 행복하다고, 그것도 아주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꼭 안아줘도 눈물을 보이신다.



엄마의 꿈.



비록, 대학이 전부였던 엄마의 꿈을 이뤄드리진 못했지만, 그 이상의 것으로 채우려 오늘 하루도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반드시 엄마 이름의 재단을 만들어 나를 선택해준 엄마가 옳았다는 꿈을 이뤄드릴 것이다.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50년이 걸리든. 반드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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