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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e Punch Capital Feb 07. 2023

자퇴인생

1997년 대전 과학고를 자퇴했다. 중학생 때까지는 우등생이었지만 과학고에 가보니 나보다 재능 있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첫 중간고사에서 (90명 중) 78등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고 공부에 대한 의욕을 상실했다. 어느 날 전학 가고 싶다는 나를 꾸짖던 담임 선생님이 다짜고짜 뺨을 때리셨는데, 나도 홧김에 선생님을 밀치며 대들었다. 어머니가 학교로 오셔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셨지만 난 사과하지 않았다. 퇴학 조치를 받고 그 길로 어머니와 기숙사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출장에서 돌아오셔서 뒤늦게 나의 자퇴 소식을 접하신 아버지는 화를 내셨고 어머니는 옆에서 우시기만 했다.


이듬해 운 좋게 전국의 특목고에서 자퇴 열풍이 불었다. 비교내신제가 폐지되면서 내신등급 경쟁에서 불리해진 전국의 특목고생들이 자퇴를 하고 입시학원으로 몰렸다. 나도 이들에 합류해 대전의 한 재수학원에 등록했고 수능시험을 준비했다. 과학고 때의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문과로 전향했다. 당시에 읽었던 최인훈의 “회색인”이라는 문학작품에 서울대 정치학과생 “김학”이 나오는데, 그가 너무 멋있어서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과학고 자퇴 후 삐딱해진 나의 세계관도 한몫했다. 강준만, 진중권 등의 좌파 지식인들의 책에 빠져있었고, 나의 실패가 내 탓이 아닌 사회 탓이라는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9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과선배들이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운동권, 고시파, 그리고 유학파였다. 난 자연스럽게 운동권 선배들과 어울렸고 서울시내 집회를 빠짐없이 출석하느라 강의에 거의 안 들어갔다. 내가 속해있던 학회 선배들은 소위 말하는 정통 좌파였는데 마르크스 엥겔스 사상을 성경처럼 떠받들었다. 1년 동안 운동권 학생으로 살다 보니 학점은 형편없었고 동기들과의 관계도 서먹해졌다. 군 복무 후 어찌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가기로 했다. 일찍부터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준비한 동기들은 시험에 합격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동안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2005년 캐나다 맥길(McGill) 대학으로 어학연수를 갔는데, 캠퍼스에서 공부하는 캐나다 대학생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서울대 도서관에는 각종 고시생들만 가득했지만 맥길대 도서관에는 전공 공부를 하는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막연하게 나도 여기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캐나다 대학 입학을 알아보던 중 운 좋게 워털루(Waterloo) 대학의 수학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대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두 번째 자퇴를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필수과목으로 들었던 CS 수업에서 프로그래밍을 처음 접했다. 원래 액추리얼 싸이언스(acturial science)를 전공하려다가 컴퓨터 싸이언스(computer science)로 전공을 바꿨다. 나와 동갑내기인 4학년 선배가 CS를 공부하라고 적극 권했기 때문이다. IT가 닷컴버블로부터 서서히 회복하는 시기였는데 앞으로 업황이 훨씬 좋을 거라고 했다. 그는 당시 "스타트업"이었던 엔비디아(Nvidia)에서 잡 오퍼를 받아놓고 졸업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캐나다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취직했다는 게 너무 대단해 보였다. 나도 그를 동경하며 밤낮으로 CS를 공부했다.


2010년 드디어 워털루 대학을 졸업했다. 이미 나이는 서른이었다. 다행히 나도 미국 실리콘밸리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 후 10년간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남보다 뒤처졌다는 열등감 때문에 집과 회사만 오갔고, 유창하지 않은 영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업무량을 최대한 늘렸다. 그 결과 넷플릭스와 슬랙 같은 빅테크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수년간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커리어가 쌓일수록 업무능력보다는 리더십이 더 중요했다. 혼자 일만 잘해서는 승진이 더 이상 힘들었다. 빅테크 기업 기준으로 "레벨 6" 스태프 엔지니어(Staff Engineer)가 나의 마지막 타이들이었고, 나는 현재 은퇴했다. 세 번째 자퇴인 셈이다.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데, 이건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아니다.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오히려 건강을 해칠 정도로 너무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방향을 무시한 채 무작정 뛰기만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을 계획하고 계산된 노력을 했다면, 적은 노력으로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믿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이 말은 절반의 진리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목표가 불분명하다면 어쩌면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뭐든 열심히 할게 아니라 확실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게 중요하다.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것이 젊은 나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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