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빠 키우기

울 아빠 변신 프로젝트

by 명랑처자

어느 순간부터 가난해진 우리 집은 매일 싸움의 대상들이 바뀔 뿐이었다. 잠깐 우리 집을 소개하자면 엄마, 아빠, 1남 3녀로 된 여섯 식구다. 47년 전 70평 정도의 땅을 사서 엄마, 아빠 두 분이 인부들과 함께 벽돌집을 지으셨다고 한다. 안채도 있지만 월세방도 4개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아주 어릴 적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집이었다.
점점 우리 집의 가장은 엄마가 되어갔다. 공장을 입사하시게 됐고, 끝없는 야근을 가 하시며 우리 4남매를 혼자서 키우셨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닌 시간들이었다. 그 사이 아빠는 한마디로 말해 사고 치는 초등학생상태로 요즘 세대 말로 노답이었다. 하지만 아빠도 엄마와 결혼 초에는 '삼익악기'라는 회사에서 제법 긴 시간 동안 일하기도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아빠는 회사사람들과 도박에 빠져 버렸었고, 당연히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날들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5년 동안 그랬다고 하니 우리 엄마 성격에 진짜 도를 닦으신 듯하다. 그 사이 엄마는 정말 성실을 뛰어넘어 매일 새벽 2시쯤 퇴근하셨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은 두 분이 얼굴만 마주치게 되면 상 받을 정도로 끝없는 부부싸움이 지속되었다. 아주 지겨울 정도로 말이다.

어느 날 아빠에게 물었었다.
"아빠가 젊었을 때 긴 시간 동안 도박에 빠져서 엄마 속 엄청 썩였었다며?! 사실이야??"
"음... 그때 경찰들을 피해 담장을 한 번에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붙잡히지 않았잖아 내가 그만큼 운동실력이 대단했단 말이지"라며 자랑을 하셨다.
난 진심으로 그 순간 창피한 아빠의 생뚱맞은 대답이었다. 과거에 그랬다고 대답해 주셨지만 정말 창피했다. 그저 속으로 '그냥 웃지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엄마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말씀하시길 바람은 피우지 않았다고 강하게 말씀하시니 믿어 드리겠지만 인간적으로 '그때 가족들을 위해서 생활비정도는 벌었어야지'라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었다.
아빠의 모습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던 집이 어느새 쌀이 떨어질 정도의 집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다 조기축구를 하다가 세 번이나 수술을 하셨던 아빠는 퇴직금은 어딘 가에 투자하면 몇 배가 된다는 말을 믿는 바람에 전부 날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또한 주변인이 보증을 서 달라고 했는데 거절을 못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엄마가 해결하시게 됐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나라도 굿을 한판 하거나 이혼 생각 했을 것 같다. 아빠는 뭘 해도 되는 일이 한 개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이 들었을 것으로 그려지니 말이다.
그래도 나한테는 '저 사람은 나에게 아빠라는 사람이니까 포기하지 말자'라는 이런 생각을 초등학생 때부터 했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 혹은 '특히 남자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말들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런 말들을 늘 반대로 생각할 정도로 착한 둘째 딸이었다. 여섯 식구의 가장이었던 우리 아빠는 분명히 내가 좋아했던 변신 로봇처럼 시간이 지나면 단계별로 변신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를 키우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이 걸리는 나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시절 아빠의 나이를 지나쳐보니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아빠는 한동안 집에 계셔야 하니 얼마나 1남 3녀 자식들이 부담스러웠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을 허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동폭력과 기물파손을 했던 본인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되겠지만 일단 나는 '후회' 할 수 있게 만들어 놔야겠다는 나 나름의 소소한 복수를 틈틈이 하면서 지냈었다.


물론 자주 때리지는 않았었고, 이유가 있어야 때렸었지만 폭력의 끝은 항상 아빠와 가까이에 있는 물건들을 박살 내는 거였다. 회생 불가능하게 말이다. 그래서 일단 나는 '아빠가 직접 만든 소중한 아빠의 기타'부터 시작했었다. 화를 주체 못 하시는 그때 슬쩍 가까운 위치로 밀어놔 줬다. 그랬더니 역시나 기타를 박살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는 난 속으로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기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휘파람이 절로 나왔었다. 그런데다 분명히 아빠는 시간이 지나 아까워할 거라고 생각하게 되니 깨소금 맛이었다. 그래서 이 날 이후부터는 이런 식의 복수를 자주 하게 되었었다. 어느 날 다이얼을 돌리는 방식의 집 전화기를 파손 한 뒤엔 버튼식으로 바뀌게 되었었다. 그래서 한번 더 무선전화로 바뀌게 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그렇게 바뀌진 못 했다.
몇 년 전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대화를 하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빠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셨었다.
"막내가 5살 때 내가 기타를 박살 내는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더라. 그래서 놀랐어. 하지만 내가 애들을 때리지는 않았잖아"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난 이어서 말했었다.
"무슨 소리야?! 맞은 년이 여기 있는데...?! 원래 맞은 년은 못 잊고, 때린 놈은 잊어버리는 거야. 그래도 내가 전부 용서해 주지"라고 말하자 어느새 아빠는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셨다.
하지만 나도 이제 40대 중반이 지나 보니 과거에 우리 아빠는 왜 그랬는지와 그냥 뭘 해도 안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몸까지 아픈 상태이니 얼마나 짜증이 나고, 화가 많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며 이해되는 부분도 있긴 했었다. 그렇지만 아동폭력과 기물파손은 어떠한 상황이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고,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은 어른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일 것이다. 정작 본인은 기억조차 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는 동안 엄마가 회사를 다니시고, 월세를 받아도 교육비는 감당이 안 되는 경제상황이라 안방을 절반 나누어 '삼익 문방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주 착한 둘째 딸로 알고 있는 나에게 맡기길래 난 베프네 집에 가서 늦게 들어오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왜냐하면 늘 밥상을 차려다 주면 아주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아 욕을 하며 엎어 버리곤 해서 일단 나의 경우엔 밥상이 엎어지기 전에 빨리 밥을 먹고, 오늘 부서져도 괜찮을만한 것을 아빠 근처에 두고 난 내 방으로 도망을 간다. 그리고 난 후 난 절대 두 번 밥상을 차려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엎어진 밥상을 치워주지도 않았었다.
그런데도 이런 아빠를 변화시키자 생각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학습의 효과는 나타나고, 조금 더 기다린다면 바뀔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난 한동안 언니와 여동생이 결혼할 때까지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고, 착한 둘째 딸 노릇만을 하고 있었었다.
하지만 아빠는 나의 잠재적 VIP고객이라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복을 발로 계속 차고 있었다. 한동안 집에서 난 간단한 대화조차 하지 않았었고, 대화가 없는 집으로의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 드렸었다.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집에서는 정말 유령처럼 지냈었다.
어느새 아빠는 환갑이 되기 전이었고, 이렇게 열정과다로 매일 싸우시는 엄마, 아빠 덕분에 난 추운 집에서 자주 탈출했었고, 난 정말 갈 데가 없었던 시기였었다. 그래도 이때부터는 의리로 이 집에서의 생활을 셋이 하게 되었고, 아빠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환갑이 넘어가는 아빠에게 당근 작전을 돌입을 하게 되었다.
우선 아빠가 해 줄 수 있는 집안일을 아주 친절하게 부탁하고, 마지막에는 꼭 고맙다고 표현했었다. 아주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해야 할 집안일은 많기 때문에 아빠가 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게 됐었다. 암튼 여기에서 중요한 건 '정중한 부탁, 연약하게 보이는 말투의 연기력, '고맙다'라는 말과 함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칭찬까지' 모두 빠지면 안 되는 법칙이었다.
그 후로 아빠는 아파트 경비 일을 시작하셨고, 난 아빠를 위해 굉장히 자주 갔었다. 우선 맛있는 음식 위주의 간식을 정문아저씨의 몫까지 갖다 드렸고, 항상 음식에 대한 평가를 들으며 일하는 데 고생하셨다는 표현은 빠트리지 않았었다. 진짜 칭찬은 아빠도 춤추게 만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새벽에 근무가 끝나고 집에 오시면 가끔이라도 그 시간에 일어나서 오늘도 수고 많으셨다는 말을 꼭 해 드렸다. 그리고 함께 살고 있어도 아빠가 근무하실 때는 매일 전화통화를 하며 소소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럼 아빠는 '대부분 어디인지, 저녁은 무엇을 먹었는지, 엄마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셨었다. 최근에는 날 사랑한다고 말하라며 협박 아닌 협박도 자주 했었다. 그러다 보면 지나가는 말로 가끔 하시곤 하는 아빠로 변신에 성공했다.

그래서 대부분 젊은이들만 간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함께 가고, 드셔보지도 못했던 음식들을 함께 먹으러 다니고, 대화를 하며 의견을 꼭 물어보고 그에 대한 해답을 아빠와 함께 찾으며 깨달음을 얻는 시간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빠와의 대화 시간이 길어지고, 서로에 대해 아는 시간들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어느새 아빠는 세탁기 작동 시키는 것 제외하고는 모든 집안일을 하시게 되었다. 특히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게 설거지라고 말하는 바람에 항상 하게 되었다. 그냥 자주 하셨던 밥인데도 엄마가 한 것보다 아빠가 더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 드리니 정말 꾸준히 자주 하시게 되었다.

사실 이쯤 되면 내가 이용해 먹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아빠는 51년생이신데 축구사랑으로 2일에 1번은 2게임정도 뛰신다. 하지만 건강을 자만할 수 없다고 하니 줄이시라고 아무리 협박을 해도 바뀌지 않기에 그냥 놔둔다. 2024년 건강검진으로 약간의 관리가 필요한 곳이 생기게 된다고 하니 아빠의 소원대로 100살까지 살겠다는 수다는 잠시 넣어두게 되었다.

아빠를 생각하다 보면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었던 아빠의 젊은 날의 나이가 나 역시 지나가보니 아주아주 조금만 이해하게 되었다. 아직도 잘 드시고, 축구도 열심히 하시고, 경비일도 10년을 바라보시다니 그래도 완벽한 변신을 완성시킨 내가 대단한 것 같다. 그런데 다시 하라고 하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려 많이 즐기지 못한다면 힘이 더 많이 들 것 같다. 좀 더 일찍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