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세>에서 <최후의 만찬>까지
2017년 8월 24일 방송된 JTBC <썰전>에서 내게 낯익었던 예술 작품이 소개되었다. 종교인 과세 논란을 주제로 패널들이 이야기하면서 등장했던 <성전세>는 이탈리아 미술가 마사초 Masaccio의 작품이다. 그는 그림에서 원근법을 최초로 도입한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성전세>는 납세를 강요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귀족에게 주어진 사회적 기여 의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사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사람(나와 같은 사람)이 회화 작품에서 사회적 메시지까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이 그림이 보여주는 구조적 안정감은 누가 봐도 인정하고 공감할 만하다.
산과 강, 땅 그리고 건물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소실점을 만들었다. 소실점의 위치가 그림 정중앙에 위치하지 않아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채도를 조절하여 먼 산의 모습을 희미하게 표현한 공기 원근법도 사용하였다. 더불어 인물들의 머리 위치도 동일 선상에 있어 대칭과 균형미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르네상스 미술이 지녔던 구조적 조화로움이 제대로 구현된 작품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3대 천왕으로 레오나르도 Leonardo,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라파엘로 Raffaello를 선택한다. 그들이 활동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은 전성기를 경험했다. 3인방의 작품들 속에는 르네상스 미술이 가졌던 특징들이 극대화되어 나타나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비례와 균형미를 한방에 담아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한가운데 존재하는 창문 앞에 예수의 얼굴이 있는데 이것이 소실점 역할을 한다. 주위에 있는 12명 제자의 얼굴이 소실점과 일직선 상에 있으며 벽 옆면에 위치한 천 또한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어, 보는 사람이 구도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탁자 위에 놓인 빵의 위치에서도 규칙성을 느낄 수 있다. 채색을 이용한 원근감도 살아 있으며 인물들의 표정도 제각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중세에 만연했던 종교적 색채를 담백하게 줄였다는 평가도 받는데 예수 얼굴이 만들어내는 후광을 창밖에 비추어지는 밝은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굵직굵직한 황금 비율적 틀 안에 세밀한 묘사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600여 년 후의 현대인도 그림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사에 기록된 ‘최후의 만찬’ 이름을 가진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제외해도 다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순간이기에 많은 예술가들에게 미적 영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작품마다 연출되는 구별되는 느낌을 읽어내는 감상도 매우 흥미롭다.
고딕식 실내 장식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가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선사하는 엄숙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등장하는 인물 속 표정으로 누가 베드로이고 요다 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사실적 모습을 반영해서인지 레오나르도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던 완벽한 대칭 미는 감상할 수 없다. 하지만 생생한 표정 묘사는 르네상스 시대 작품들이 가졌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낸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Andrea del. Castagno 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다. 인물들 뒤에 있는 벽화에서 그림 자체가 뿜는 화려함과 다채로움이 느껴진다. 진면목은 압도적인 균형미에 있다. 일정한 폭을 가진 6개의 벽화 그리고 벽화 변연에 일렬로 배치된 예수와 12제자의 얼굴, 천정과 평행하게 배치된 식탁은 균형미의 정석을 보여주는 듯 하다. 식탁의 길이 조차도 양쪽 끝에 위치한 벽화의 1/2까지만 설정되어있다. 화려함이 버무려진 안정감은 다른 <최후의 만찬>에서는 풍기지 않았던 느낌이다.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Domenico Ghirlandario 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그렸다’보다 ‘창조했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곡선을 이용한 대칭성 그리고 소실점을 기준으로 그은 가로 평행선이 노골적으로 벽의 틀로 나타나 있는데 어색하지 않다. 틀 아래 평행하게 배치된 등장인물 머리와 식탁까지 보라! 곡선과 직선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은 다른 어떤 <최후의 만찬>에서도 경험할 수 없던 궁극의 미이다. 일부 장식물이나 나무 장식을 살짝 다르게 배치한 것은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지나친 완벽성 때문에 감상자가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다른 작품 <베스푸치 가문과 함께 한 마돈나>에서도 유사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된 푸 란스 푸르브스 FransPourbus 의 르네상스 후기 작품이다. 이미 언급했던 대칭성과 균형미, 다채로운 인물들이 가진 표정이 조화롭게 표현되었다. 다만, 가운데 위치한 예수 얼굴 뒤에 후광을 과장하여 억지스럽게 나타낸 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벗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동일한 주제와 소재를 예술가마다 다르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누구나 ‘최후의 만찬’을 맞이 할 것이다. 내가 가질 ‘최후의 만찬’ 은 누구와 함께 할까? 그 순간이 풍기는 객관적인 분위기는 어떨까? 같이 할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당자자인 나, 자리를 함께할 주변인, 혹시 있을지 모를 제3의 위치에서 관찰하는 사람. 각각이 가지는 감정과 기분은 다를 것이고 그림으로 표현된다면 참 다채로울 것이다. 상상하는 재미 덕분에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늘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