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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딩인가HR인가 Aug 31. 2021

안녕, 이 달의 영수증

회사에서 카톡 PC 메신저의 존재감을 경험하는 순간

꼬깃꼬깃 접혀진 영수증을 책상 위에 반듯하게 펴서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사진 앱을 켜고는 가지런히 놓여있는 영수증에 네모난 화면을 맞춘다. 카톡을 열고 <나와의 채팅> - 대화창 옆의 [+] 버튼을 누르고  <앨범> -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영수증들을 쭈욱 체크하여 <전송> - PC 카톡 메신저로 이동하여 대화창에 좌르륵 띄어져 있는 영수증 사진 중 하나를 클릭하고 <묶음사진 전체 저장>- [비용처리-202108] 폴더에 'KakaoTalk_20210831_xxx'이름의 사진들을 저장한다. 



시스템에 이달 사용한 법인카드 내역들을 불러온 후 한땀한땀 정성껏 사용날짜와 승인처를 확인하고 영수증 상에 기재된 금액과 비교해가며 사진 파일을 각 내역에 맞게 첨부한다. 카드 사용 내역은 대부분 업무 미팅을 빌미로 한 식사, '이날 누구랑 밥을 먹었더라?'라는 생각이 들면 지체 없이 아웃룩 스케줄을 열어 예약 내용을 확인한다. 이미 내 기억력은 아웃룩과 네이버, 아이폰 캘린더에 의존한 지 오래. 이쯤 되면 기록은 잊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잊어도 상관없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시스템에 기록되어 있는 스케줄을 확인하여 또 다른 시스템의 항목에 미팅 참여 인원과 이름을 적어 넣는다. 



중간중간에 영수증을 잘못 첨부하여 입력된 파일을 취소하고 다시 업로드를 해가면서 삼분의 이(2/3)쯤 비용 입력을 했을 때, 아무리 찾아도 영수증이 보이지 않는 내역이 발견된다. '도대체 이 영수증을 어디에 둔 거지? 분명 모든 영수증은 다 같이 여기 가방에 넣어두었는데...'라는 생각이 들고 슬슬 짜증이 올라 오려 할 때, 누군가 머리를 한 대 세게 내려치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 '아! 출장 다녀올 때 SRT 타고 다녀왔었지! 앱으로 예약해서 핸드폰에 사진 캡처해 두었었는데...!'. 다시 휴대폰의 사진 앱을 열어 엄지손가락을 재빠르게 아래로 쓸어내리며 캡처해놓은 SRT 티켓을 찾는다. 그 사이 우리 아기 사진, 음식 사진, 워크숍 사진 등이 휴대폰 앨범에 뒤섞여 SRT 티켓에 커다랗게 박혀있는 QR코드가 없었다면 티켓을 찾기 더 어려웠을지 모른다. 왕복 티켓 두 개를 클릭하여 다시 카톡으로 전송. 



거의 다 왔다. 이제 남아있는 비용 내역은 두어 개 남짓. 그런데 또 이놈의 영수증이 보이질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 간 것인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출장 때 중간중간 이용한 택시인 것 같다. 늘 카카오 택시를 이용하는데 조금이라도 빠르게 호출이 가능할 것만 같은(?) 블랙을 호출해서 그런지 1,000원짜리 수수료가 찍혀있는 내역 하나와 13,750원짜리 내역이 남아있다. 택시는 영수증을 받지 않았지만, 괜찮다. L 카드사에 들어가 명세서를 확인하면 되니까. 다행히, 지난번에 L 카드사 홈페이지의 비밀번호를 다시 갱신하여 아이디와 비번을  윈도우 '스티커 메모'에 기록해 놓았었다. 훗. 



한메일 시절 우연히 만들게 된 것이 이제 어지간한 사이트에서 아이디로 사용하고 있는지라, 이제 족히 2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민망한 아이디와 10자리 비밀번호를 누르고 로그인. <나의 카드-이용명세서 확인>에 들어가 '기간'을 1개월로 설정하고 내역을 살펴본다. 천 원과 만 삼천칠백오십 원이 찍혀있는 항목을 찾아 명세서를 다운받고 캡처까지 완료. 마지막 두 개의 비용 내역 입력을 끝으로 이렇게 시스템 입력 작업을 마무리한다. 



마지막 아주 중요한 수작업이 남아있다. 


반듯반듯하게 누워있는 영수증 뒤면의 사각 구석에 살금살금 풀칠을 한 후, 혹시라도 떨어질세라 두세 번씩 꾹꾹 눌러 복사실에서 가져온 이면지에 붙여준다. 앱으로 예약한 SRT 티켓과 택시 영수증은 파워포인트를 열어 '그림 불러오기'를 하여 가지런히 위치시킨 후에 출력해 준다. 영수증의 순서는 가능한 출력한 비용 리포트와 그 순서가 일치하는 것이 좋다. 매달 이맘때쯤이면 불철주야 마감에 정신이 없는 재무 담당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니까.  풀칠로 종이에 딱 달라붙어 있는 영수증 하단에 리포트에 표기되어 있는 비용 내역의 알파벳을 작게 적어준다. A, B, C, D... 



끝으로 혹시나 빠진 내역은 없는지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오늘 알파벳 마지막이 S로 끝났으니 A, B, C.. 순서대로 세어보면 S는 19번째 알파벳. 따라서 영수증 19개가 이면지에 붙어있어야 한다. 하나, 둘, 셋, 넷... 열아홉. 숫자가 일치한다면 영수증이 붙어있는 이면지는 호치키스(스테이플러)로 딱 박아주고, 비용 리포트는 이면지와 함께 클립으로 연결하여 한 세트로 만들어준다. 이제 이 서류를 재무팀 옆의 작은 바구니에 제출해놓으면 끝. 재무팀에 도착해보니 이미 많은 수의 비용 리포트가 산더미를 이루어 쌓여있다. 혹시나 내 리포트와 영수증이 붙어있는 이면지가 분리될까 싶어서 옆에 놓여있는 좀 더 쫀쫀한 클립을 찾아 종이에 물려놓고, 마치 젠가 게임을 하듯, 혹은 등산길 소원을 빌기 위해 켜켜이 쌓아놓은 돌들 위에 작은 돌을 하나 더 조심스레 올려놓듯, 내 서류를 올려놓고 나는 총총 사무실에서 사라진다.  



매달 이맘때쯤 되면, 직장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르는 ritual - 카톡 PC메신저가 회사에서 실행되는 것이 다행, 그마저 없었다면 휴대폰에 저장된 영수증 사진을 보내기 위해 메일을 보내거나 클라우드를 이용해야 했을까? 


수많은 과정과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이 ritual을 성공적으로 치르면 적지 않은 뿌듯함(?)이 느껴질 정도. 이것도 작은 성취라면 성취. 'Go Digital'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한,  슬기로운 직장생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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