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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딩인가HR인가 Oct 16. 2021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관계를 현명하게 다루는 법을 배운 적이 있는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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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길지도 그렇다고 아주 짧지도 않은 인생 속에서 다양한 관계를 이루고 살아간다. 누구나 삶에서 관계를 이루고 살아간다. 아니, 삶은 곧 관계 그 자체라고 해야 더 맞는 말일지 모른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지금껏 만들어온 관계를 돌이켜 생각해보고,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스스로 정의 내려보며, 관계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고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곱씹어 보게 된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자식의 인연을 맺는 것으로 시작되는 관계는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지닌 나무의 뿌리와 줄기처럼 우리 삶이 지속되는 내내 또 다른 관계들을 잉태하고 파생된다.  


삶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관계를 잘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죽음은 곧 심장이 정지하고 숨이 멈추는 육체적 죽음뿐만 아니라 관계가 단절되는 찰나이기도 하다.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 수년간 근무했던 조직과 동료와의 이별, 아끼던 물건을 누군가에게 넘겨준다거나 지금 하고 있던 일을 정리하는 일도 또 다른 의미에서의 죽음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삶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련의 관계의 생성과 소멸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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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해 보면, 

초, 중, 고 12년, 그리고 대학교 4년, 여기에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2년. 거의 20년 동안 공교육과 사교육을 넘나들며 다양한 배움의 과정을 거쳐왔지만, 단 한 번도 '관계를 현명하게 다루는 방법'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의 관계를 성숙하게 다루는 방법이라든지, 내 주변에 있는 물품들을 더욱 값지게 활용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방법이라든가,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관계를 나눌 때 필요한 유의사항 들을 학교를 다니면서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제 와서 따져보니 직장에 들어오고 나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리더십'이나 '팀워크'라는 이름으로 '조직 안의 관계'에 대해 그나마 약간의 지식과 방법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이가 마흔 줄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는 가족과의 관계에 미숙하고, 내 자녀와의 관계에 서툴며,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설프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부모를 통해 '성숙한 관계'에 대해 보고 배우고 학교에서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시행착오를 겪고 스스럼없이 토론해야 비로소 사회에 나와 조금이라도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성숙함을 고민하는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될 텐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학교에서 그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고, 부모를 통해 성숙한 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훈육을 받아본 적도 없으며, 주변의 선배나 스승으로부터 현명하게 관계를 만드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입시만을 생각하던 10대 시절, 그리고 오직 나의 생존만을 염려하던 20대 시절에 만난 다양한 인연들과의 만남 속에 맞닥뜨린 시행착오를 통해 '체험적으로', '이전보다 조금 나은 관계를 만드는 법'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조금씩 발전시켜 나갔을 뿐,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역시 지식과 경험의 한계에 갇혀 경계를 벗어난 적용과 실천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는 것이 더하기, 빼기 뿐이었던 아이가 곱하기와 나누기를 익히고는 조금 더 복잡한 사칙연산을 만들어놓고 완벽하다며 으스대는 모습과 비슷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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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 곁에, 사칙연산을 만든 것도 굉장히 훌륭하지만 제곱과 루트라는 것도 있다고 나아가 인수분해라는 것도 있다고, 내가 알던 세계의 지경을 넓혀주는 그 누군가가 있었다면 조금 더 겸손하게 나의 앎을 완전한 앎으로 여기지 않고 '유연한 앎'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앎'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존중해 주면서도 내가 모르고  있는 것까지도 존중해 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누군가 잘 모르는 낯선 영역을 앎의 영역으로 이끌어 그것이 그의 당연한 세계가 되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낯설고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이가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배움과 학습의 과정은 그 자체로 '관계를 현명하게 다루는 법'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종종 이야기했었다. 무언가 일을 시작하고 그 일이 잘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고 이야기한다. 


삶에서 유종의 미를 잘 거두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관계에서 유종의 미를 잘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유종의 미를 잘 거두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시작해야 할까? 


지금 내 옆에서, 하루가 다르게 야위고 거친 숨을 반복하면서 삶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관계의 정리를 생각한다. 또 한쪽에서,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아빠를 외치는 아들을 바라보며 관계의 시작을 생각해 본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질문을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삶의 끝자락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한 게 아닐까. 


스산한 바람이 부는 10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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