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의 힘] 진정한 '앎'에 대해서
_논문의 힘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어떤 선배가 미국 대학의 첫 세미나 시간에 겪은 일이다. 미국 유명 대학에 입학하여 맞이하게 된 첫 세미나 시간, 설레는 마음으로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은 선배는 책으로만 접했던 세계적인 석학 교수의 강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앳된 얼굴의 20대 외국인 스무 명 남짓이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강의실에 들어온 교수님은 강의실을 한 번 둘러본 후 말문을 열었다.
"여기 앉아 있는 학생 중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해 아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선배는 잠깐 코웃음을 쳤다. 이학 전공 대학원생 중에 유명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선배는 호기롭게 손을 들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강의실 안의 외국 학생들 중에서 손을 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선배는 우쭐대는 심정이 들었다. '이것 봐라. 미국 대학원 수준도 별거 아니네.' 손을 든 학생들을 둘러보던 교수님은 선배 뒷자리에 앉은 한 학생을 지적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해 안다고 손을 들었으니, 그 사람에 대해 설명해 주겠어요?"
교수님의 선택을 받은 학생은 갈릴레이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학생의 설명은 장장 20분 가까이 지난 후에야 끝이 났다. 외국 학생의 설명을 들으며 선배는 자신이 들었던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고 한다. 만약 자신이 선택받았다면 갈릴레이에 대해 얼마나 오랫동안 설명할 수 있었을까. 자신은 고작 갈릴레이에 대한 몇 개의 단편적인 정보를 평면적으로 나열하는 데 그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안다는 것을 그 대상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 몇 가지를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식으로서의 '앎'은 단순한 정보의 집적일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투과해 자기화된 정보 내용이 아니면 선택과 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보 내용에 초점을 만들어주는 논점과 그것을 드러내는 구조가 바로 정보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지식은 수집된 정보를 판단하는 인식적 활동, 선택의 관점, 그런 관점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 전략을 통해 구성된다.
정보와 지식을 구별해야 하고, 앎의 차원은 단순히 대상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투과한 문제화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어디 논문 쓰기뿐일까.
회사에서도 일을 하며 가끔 팀원들에게 '어젠다를 세팅하는 것이 곧 실력이다'라는 말을 한다. 기획 단계에서 어젠다를 세팅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관점이 필요하다. 똑같은 조직 이슈를 듣더라도 본인의 논리와 생각을 투과하여 본인이 생각하는 문제의 본질을 정의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단계에서 무엇을 먼저 다루어야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지 선택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제공되는 정보를 충분히 곱씹고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논점에 따라 선택하여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스스로의 인식 체계가 확립되지 않으면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그때마다 끌려가거나 현상에 대응하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주관적 해석에 치우쳐 오히려 현실을 비약하고 곡해하게 된다. 단편적 정보를 수용하는 일은 능동적인 두뇌 활동을 요구하지 않으며, 수집된 정보는 지식과 달리 언제든지 새로운 정보가 등장하면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