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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May 21. 2020

온 몸에, 온 마음에 새기는 여행

지구를 거닐다_20160304

머리부터 발 끝까지 흠뻑 젖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한국에서 준비해 간 우비를 단단히 챙겨 입었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묵직한 물방울들이 얼굴을 강하게 때렸다. 물을 먹은 머리카락은 눈 앞에 찰싹 달라붙어 시야를 가렸다. 우비를 파고든 물줄기는 얇은 티셔츠 안까지 흘러들었고, 속옷까지 홀딱 적셔 놓았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들은 낙하하는 아쉬움을 바닥까지 토해냈다. 어딘가 거인들이 사는 세계가 있다면, 그곳의 폭포는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짐작케 했다. 둥둥 둥둥- 거인들이 둘러앉아 북을 치듯, 땅이 요동치고 폭포가 절규하는 소리가 이 땅을 뒤덮었다. 추락하고 싶지 않은 존재들은 생의 에너지를 끝까지 끌어 모아 거대한 물줄기에 떠밀려 내려가다 하강의 순간 단말마를 터트렸다.


보이지 않는 저 아래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또 다른 강력한 힘은 이 거대한 물줄기를 아래로, 더 깊은 아래로 잡아끌고 있었다. 이 장엄한 물의 향연에서는 누구나 할 말을 잃고, 누구나 사진기를 들이대기 바쁘다. 마치 내일이면 이 거대한 폭포가 사라져 버릴 듯이, 이번 생애에서 다시는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할 사람처럼 모두가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아쉬움이 남는 곳, 거대한 생명의 물 앞에 자연을 존경하게 되고, 성난 물줄기를 한 순간에 제압해버리는 위대한 중력의 힘 앞에 탄식 대신 두려움을 갖게 되는 곳, 바로 이과수 폭포다.

 



누구라도 호들갑을 떨게 되는 이과수 폭포 앞에서 유일하게 정지 화면 속에 있는 이가 있었다. 빛바랜 낡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몸집만 한 큰 배낭을 앞뒤로 멘 모습이었다. 이과수에 닿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아주 긴 시간, 꽤 먼 거리를 묵묵히 지나오다 결국 이 곳에 도착한 듯 경건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미동도 없이 그저 눈 앞의 폭포만 응시했다. 거대한 배낭이 폭포 물줄기에 젖어들며 서서히 묵직해져 갈 때도 그는 어떠한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저 정면만을 바라봤다.





오로지 그와 폭포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요 속에 있던 그가 드디어 움직였다. 그는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을 온전히 맞아 내겠다는 듯 그는 얼굴을 들어 폭포를 마주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신성한 의식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과수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눈으로 살피던 그가, 이제는 물줄기의 웅장한 파동, 물방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냉기, 비 내리듯 주변을 감싸는 순간의 습기, 비릿한 물 냄새 등 그 모든 것을 온몸에 저장하려는 듯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과수 폭포가 어떠한 의미였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연에 대한 경외, 꿈꾸던 곳에 닿았을 때의 감동, 그 순간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만은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덩달아 나까지 숨을 죽였던 시간이었다.





중력에 의해 사방으로 튀기던 물줄기는 그를 완전히 적셨다. 우비 하나 없이 폭포수 세례를 맞은 그의 모습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력해 보이지 않았다. 오랜 갈증을 해결하듯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메말라가던 나무가 비를 만난 듯 살아나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배낭을 뒤적거리더니 카메라를 찾아냈다. 카메라 역시 그처럼 무방비 상태였다. 카메라가 고장 날까 비닐로 꽁꽁 싸매고 사진을 찍던 대부분의 관광객들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그가 셔터를 눌러댔다. 3~4장이나 찍었을까. 한동안 이어질 거라 예상했던 셔터 소리는 무색하리만큼 찰나에 끝이 났다. 수없이 카메라를 들이댔던 나와는 달리, 그의 이과수는 고작 몇 차례 뷰파인더에 담겼을 뿐이다. 그 흔한 인증샷도 찍지 않았다. 이미 폭포를 온전히 담았으니, 기념사진 따위는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그는 다시 카메라를 배낭에 집어넣고는 한참이나 더 뚫어지듯 폭포를 바라봤다.



모두의 이과수였지만, 그에게는 혼자만의 이과수가 존재했던 순간이었다. 홀리듯 카메라에 그를 담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사진 찍기를 그만두었다. 이미 폭포에 압도되어버린 그는 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겠지만, 그것마저 그의 순전한 시간에 방해가 될까 염려되었다. 기념사진 한 장 없이도, 감탄의 외마디 비명 없이도, 현장의 모든 순간을 온 몸과 온 마음에 새기며 여행하는 법, 그를 통해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과수 폭포를 추억할 때면 폭포와 동시에 그도 함께 떠오를 것임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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