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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Dec 22. 2015

여행 중 부산스러운 한 끼

부부 세계여행, 지구를 거닐다_20151221

별 생각 없이 잡은 숙소가 우리 집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지내는 숙소가 그렇다. 북유럽 전반이 그렇듯이 도미토리 가격이 만만치 않은 편이다. 도미토리와 에어비앤비 숙소의 가격이 비슷하다 싶으면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찾아 지내는 것이 우리에겐 더욱 이득이다. 음식을 편하게 요리해 먹으며 경비를 줄일 수 있는 것은 가장 큰 장점이다. 코를 심하게 골아 밤을 뒤척이게 만드는 이가 없고, 시끄럽게 떠들어대 조용한 휴식을 방해하는 이가 없는 것도 좋은 점이다. 이번 숙소는 이용 후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사이트에 올라와있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 약간의 망설임 끝에 숙소로 결정했다.


전날 로바니에미(Rovaniemi)의 산타마을에서 헬싱키(Helsinki)까지 12시간의 심야 버스를 타고 온 터라 우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도착한 숙소는 다행히 사진보다 훨씬 근사했다. 한국으로 치면 남대문 시장 격인  재래시장 바로 옆에 위치해있는 스튜디오 아파트였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깨끗한 나무 바닥과 하얀색의 북유럽풍 가구가 우릴 맞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포근하잖아.


두 명이 쓰기에는 부족함 없는 식기와 요리 도구, 새 것 같은 냉장고와 햇볕에 잘 말려 바스락거리는 린넨의 침대 시트, 눈치 보지 않고 맘껏 빨래할 수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 작지만 청결한 화장실, 게다가 어젯밤 아버지 칠순이라 아직 술이 덜 깼다며 털털한 매력으로 우리를 환영해준 호스트 Timo까지. 숙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맘에 들었다.


아파트 1층 입구에서 횡단보도만 건너면 되는 재래시장(Kauppahalli)에서 우리는 싱싱한 생연어를 구입했다. 두툼한 두께에 제법 묵직한 연어를 챙긴 후에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근처 슈퍼마켓에 들러 감자와 맥주 그 밖에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구입하면서, 들뜸은 최고조에 달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연어를 소금, 레몬 그리고 후추에 절였다. 감자는 껍질을 벗긴 후 뜨거운 물에 소금을 한소끔 넣고 삶기 시작했다. 새것처럼 코팅이 완벽한 프라이팬에 휘이- 오일을 두르고는 천천히 연어를 굽기 시작했다.


오늘의 메뉴는 샐러드, 삶은 계란, 으깬 감자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였다. 냉장고에 미리 넣어둔 핀란드 맥주를 꺼내 예쁜 유리컵에 담았다. 껍질은 바삭해지고 속살까지 연한 분홍빛으로 변한 연어를 접시에 올렸다. 버터를 넣어 으깬 감자와 적당히 반숙으로 익혀진 삶은 댤걀도 곁들였다. 낮은 건물로 이루어진 헬싱키 시내는 5층 아파트인 우리 숙소 창문에서 바라봐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남편과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연어가 너무 맛있다는 말을 연발했다. 연어 속살은 카스텔라처럼 폭신했고 으깬 감자는 고소했다. 집주인이 맘껏 써도 된다고 한 양념 바구니를 뒤져 머스터드와 간장, 레몬즙을 찾아냈다. 이들을 섞어 만든 소스는 연어의 기름진 맛과 그럴싸한 발란스를 만들어냈다.


여행자 신분에 대충 때우는 일이 잦은 별 것 아닐 수 있는 한 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끼를 위한 작은 부산스러움이 오늘 헬싱키의 낯선 집을 내 집처럼 느끼게끔 했다. 적당한 볼륨으로 틀어 놓은 루시드폴의 음악과 어렴풋이 들리는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 내 앞에 있는 남편, 그리고 핀란드의 물 만큼이나 깨끗한 맛을 자랑하는 맥주. 헬싱키의 오늘 하루는 이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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