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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Dec 30. 2015

때로는 결핍이 풍요가 된다

지구를 거닐다_20151226

4개월 남짓한 시간을 유럽에서 보냈다. 9월 초 터키에서 시작해 올해 말 영국으로 끝나는 이 여정은 순조로웠다. 버스와 열차는 대부분 깨끗했다. 지독한 매연으로 코와 목을 껄끄럽게 하는 버스가 없고, 누런 얼룩 범벅인 좌석을 열차에서 보기 힘들었다. 버스는 안전하게 주행했고, 열차는 정각에 도착했다. 덥다 싶으면 에어컨을 켜면 됐고 춥다 싶으면 히터를 작동했다. 어디서든 수도꼭지를 돌리면 따뜻한 온수가 흘러나왔다. 대중교통 체크인은 스마트폰으로 예약 화면을 보여주거나 바코드를 스캔하면 그만이었다. 여러 저가 항공사가 내놓은 티켓 중 가장 저렴한 티켓을 구입하면 오히려 버스나 기차보다 싸게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했다. 부친 짐을 잃어버릴 염려를 덜었다. 중간에는 차를 빌려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힘든 곳을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했다.

인터넷은 대부분 잘 터졌다. 한국만큼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검색을 하거나 SNS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슈퍼마켓은 곳곳에 있었다. 생필품을 구하느라 애를 먹기는커녕 다양한 구색에 뭘 사야 될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그래서인가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게 많아졌다. 대형마트에서는 눈이 번쩍 떠졌다. 한국에서 비싸게 팔리는 식품 재료를 현지 가격으로 구할 수 있었고, 덕분에 밥상이 화려해졌다. 넘쳐나는 치즈와 와인, 그리고 맥주를 끼니처럼 먹다 보니 그나마 빠진 살이 다시 올랐다. 통통한 소시지와 부드러운 햄, 신선한 샐러드와 계란으로 아침을 챙겨 먹었다. 식당에서는 음식 위생에 대한 걱정을 오랜만에 접어 두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가 넘쳐 났고 근사한 레스토랑이 즐비했다. 다만  얇디얇은 내 지갑이 원망스러웠다. 정가제는 편리했다. 원하는 상품은 정해진 가격에 구입하면 되었다. 애써 흥정할 필요도, 바가지를 쓰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편리했고 풍족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왜 일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과 헛헛함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인도를 다시 여행하는 꿈을 꿨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스리랑카의 차밭에 도착했을 때 코에 닿던 신선한 찻잎 향기가 그리웠다. 갑자기 나타나 삑-하고 경적을 울려대며 호객을 해대던 뚝뚝이 생각났다. 제 때 출발하는 법이 없던 태국의 열차가 떠올랐다. 아무 때나 껴드는 오토바이 때문에 길 건너기가 조심스러웠던 하노이가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부러운 눈길과 함께 순수한 친절을 베풀던 미얀마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기본적인 생필품을 사려해도 온 동네를 뒤져야 했고, 무더운 더위에도 에어컨 하나 없이 수십 명이 낡은 버스에 끼여갔던  지난날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비로소 무엇이 나를 허전하게 했는지 깨달았다. 모든 것이 차고 넘치던 유럽에서 나는 오히려 결핍을 경험하고 있었다. 부쩍 아프리카로 떠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유럽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사하라 사막이 있는 모로코에 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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