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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an 24. 2016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

지구를 거닐다_20160112

촛불을 켜고 맞는 저녁이 누구에게나 낭만적 이지마는 않을 것이다. 손에 들려 쥔 초의 촛농이 떨어져 행여나 몸에 닿지는 않을까. 테이블 위로 곱게 깔은 식탁보에 불이 번져 붙지는 않을까. 점점 키가 작아지는 초로 인해 붙들고 있는 두 손이 뜨거워지지는 않을까. 초 하나에 지탱한 이 밤, 혹여나 마지막 초가 타 버리고 나면 다시 컴컴한 세계에 갇히지는 않을까. 촛불이 주는 낭만 대신 현실적인 불편함을 늘어놓는 이유는, 네팔에서 직접 겪은 바로는 촛불로 밝히는 저녁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던 탓이다.


"거의 다 왔어. 바로 저 앞이야."

슈테판이 카트만두의 여행자 거리인 타멜에 곧 도착한다는 말을 건넸다. 카트만두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택시를 함께 탔던 네덜란드 청년이다.


"뭐라고? 이렇게나 어둡고 음산한 곳이 여행자 거리인 타멜이라고?"
택시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는 순간 나는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이 믿어지지 않았다. 슈테판과 헤어지고 미리 잡은 숙소까지 걸어가는 동안 눈 앞에는 깊은 새벽 가로등 없는 뒷골목에서나 만날 법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고작 저녁 9시가 약간 지났을 뿐이었다.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이틀에 걸쳐 카트만두에 왔지만 설렘보다는 당혹감이 먼저 나를 덮쳐왔다. 네팔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남의 입을 통해 상상하는 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숙소 간판을 찾기 시작했다. 큰길 주변은 간간이 지나가는 택시가 밝히는 조명과 몇몇 상점이 켜놓은 촛불로 그나마 앞이 보인다는 느낌이 있었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불이 들어온 간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고 호텔은 리셉션 주위로만 겨우 불을 밝힌 상태였다. 그렇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 어렵게 숙소를 찾아냈다. 저렴한 가격이지만 그나마 평점이 좋은 곳이었다.


"No electricity, no power now."

리셉션에 있던 네팔 청년이 방을 보여주며 처음 건넨 말이었다. 그러면서 벽에 붙은 작은 조명을 키워주며 백업! 백업!이라 강조했다. 아마도 발전기를 돌려 정전 시에 사용한다는 뜻일 테지. 다행히 화장실에도 보조 전구가 하나 있었다. 평소 때처럼 환하지는 않았지만 컴컴한 곳에는 샤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나를 안심시켰다. 이틀 동안 씻지 못한 탓에 짐을 풀자마자 샤워실로 향했다. 온수 수도꼭지를 틀고 아무리 기다려도 뜨거운 물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뜨겁지 않다면 미지근한 물이라도 나오기를 빌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차디찬 물만 흘러나왔다. 게다가 낡은 수도관 때문인지 누런 물만 줄줄 나왔고, 심지어 녹이 슨 맛이 났다. 뜨거운 물에 피로를 씻고 싶었던 것은 큰 욕심이었을까. 리셉션에 물어보니 전기는 저녁에 잠깐 동안만 들어온다고 했다. 그마저도 일정치 않은 듯했다. 핫 샤워는 아침 7시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몇 시까지 뜨거운 물이 나오냐고 물으니, 눈썹을 치켜올리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 나는 너무 과한 사치를 꿈꿨나 보다. 샤워를 포기하고 저녁을 먹으러 다시 거리로 나왔다. 정전이 일부 풀렸는지 몇몇 상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밝게 빛나는 테라스가 있는 2층 식당으로 들어갔다. 만두와 비슷한 모모를 주문하자 전기가 없어 모모는 안된다고 했다. 그나마 가능하다는 치킨 수프와 볶음밥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다시 정전이 되었다. 식당 주인은 엄지 손가락만 한 초에 불을 켜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듯 주인의 대응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부엌에서도 촛불에 의지해 요리가 시작되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지만 결국 전기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촛불에 의지해 밥을 먹어야만 했다.


여행 중 정전을 겪은 적은 많았지만 일시적인 것이었다. 한두 시간 불편을 감수하면 전기는 곧 다시 들어왔다. 대부분의 숙소가 발전기를 예비로 두어 충전이나 급한 일은 처리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불 꺼진 가운데 요리를 하고, 그렇게 요리된 음식을 역시나 불빛이 없는 채로 먹은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어둠을 겁내 하는 사람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한 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 정전이 잦은 숙소와 뜨거운 물이 귀한 숙소에서 지냈던 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두 가지 상황이 한꺼번에 찾아온 적은 처음이라 마음이 편치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불편함이 그대로 피로가 되어 한숨이 터지는 순간, 테라스 아래로 지나가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렌지와 바나나가 잔뜩 실린 수레를 끌며 과일을 파는 남성, 헤드라이트 없이도 요리조리 사람들을 피해 가며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는 어린 소년, 불 꺼진 가게 앞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와 구경하고 가라며 인사를 건네는 기념품 가게 주인, 이제야 타멜 거리에 도착한 여행객들에게 방을 구했냐며 접근하는 호객꾼, 그리고 어린아이를 들쳐 업고 담배를 파는 여인까지. 저 아래에는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이들이 캄캄한 밤에도 마치 낮인 듯 아무렇지 않게 각자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불편이 묵묵히 견뎌야 일상이 된 지 오래였고, 칠흑 같은 암흑도 어제와 같은 저녁일 뿐이었다. 


'불이 들어왔나?'

조명을 보니 여전히 정전 상태였지만, 비로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둡게만 느껴졌던 식당 안도 조금은 환해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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