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사는 것이 뭐가 힘드냐 한다면 디자이너로 사는 것이라 하겠어요
내가 대학을 들어가 던 2000년도엔 너도나도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했다 특히 "러브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며 인테리어나 건축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나의 혈육인 친오빠와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물론 그 프로그램 때문은 아니다) 당시엔 IMF였고 내가 졸업한 해는 갓 벗어려나려던 순간이었다. IMF 이전 우리의 선배들은 넘치는 돈의 유동성 홍수에서 그 특수를 누리며 많은 접대와 좋은 마진으로 잘 먹고 잘 사셨으나 IMF의 결과물로 우리 업계는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아쉽게도 그 고통은 기득권이었던 그들이 아닌 그 시절 신입으로 시작해야 하는 그 시절 20대였다. 나와 내 친구들은 힘든 취업관문과 수많은 인구수( 인구 통계를 보면 알겠지만 82-80년생이 엄청난 인구수를 자랑한다)로 우리는 파워 을이었으며 어디든 들어가 경력을 쌓고 싶어 했다. 당시엔 최저시급은 턱없이 낮았으며(맥도널드 같은 곳의 최저 시급이 1800원이었다) 그 마저도 지키지 않아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걸 무기로 회사들은 인턴사원들에게 월 30-80만 원 정도를 지급했다. 감이 안 오겠지만 지금으로 쳐도 60-130 정도로 보면 된다. 한 번은 같은 미술학원 출신의 친구와 회사에서 일의 비참함을 이야기하며 나는 울면서 "난 60 받고 일해"라고 하니 나의 친구는 "난 50이라고!" 했던 슬픈 에피소드도 있다(하지만 해피엔딩인 건 그 친구는 지금은 미국 아마존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 하하)
게다가 주말근무와 야근은 예사였다. 그 시절 야근은 철야를 해야 야근으로 쳤으며 일부 회사는 12시가 넘지 않으면 택시비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경력이 없고 지원자가 많다는 이유로 우리는 젊음을 회사에 저당 잡혀 있었다. 내가 20대 중반에 다니던 회사는 위로는 아무도 3d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를 가르쳐서 시킨다는 명목으로 일을 시키며 미팅 날짜는 사장이 추석 바로 뒷날로 잡아 추석이 일을 시키고도 시간 내에 일을 못 끝냈다고 내 월급에서 그 비용을 제했다. 나는 어렸고 그것이 부당한 것을 몰랐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었나? 아니었다. 그는 그래도 비교적 착한 사람에 속했지만 시대를 잘 타고나서 죽 사장으로만 살아서 직원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절엔 그렇게 경력 없이 능력이 있는 부모에게 자본을 받아서 과거 IMF 이전에 돈과 경력을 만지고 사장이 된 사람이 많았다. 한 번은 27살 어느 해인가 일주일을 날을 새고 택시를 타고 집을 돌아가는데 잠을 못 자서 인지 나는 새벽에 택시 안에서 토했다. 나는 택시기사님께 미안해서 "저는 술 마신 게 아니라 야근해서 그래요"라고 했지만 기사님은 짜증을 내는데 그 소리가 마지 배경음처럼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걸까 언젠가 다른 나라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20대의 일이란 고행 또 고행의 연속이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일만 생각하면 토할 거 같았다. 나는 지금도 천사가 나타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줄까 한다면 노라고 말한다. 누가 청춘이 아름답고 젊어 고생은 사서 해도 된다고 했는가 젊어 고생은 나에게 갑상선만 남기고 지금도 생각하면 치밀어 오르는 화만 남았다.
그 사이 그런 업계에 지쳐서 나의 대학동기도 나와 함께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은 한해 한해 갈수록 업계를 떠나갔다. 일을 한 지 7년이 되었을까 내 주변에 나와 같은 전공이나 일을 하던 사람들이 10%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간 것이다. 천년만년 큰소리 칠 거 같던 회사들은 몇몇 유명 에이전시나 대기업을 제외하면 인력난이 슬슬 생기기 시작하며 연봉이 오르기 시작했다. 1년에서 3년 차가 될 땐 200만 원 오르던 연봉이 5년 차가 되니 600 그다음 해는 1000만 원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사람이 없어서다. 물론 그들은 또한 근성 없는 "요즘애들"을 탓했다. 다행인 것은 그러면서 차츰 업계는 나아져 갔다. 디자인은 공장처럼 찍어서 촌스럽던 뭐던 공사만 하면 된다는 회사들은 도태되어 갔고 직원이 없으니 연차도 생기고 복리후생의 개념이 생겼다. 물론 경력이 생기며 회사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업계를 많은 사람들이 떠난 덕(?)에 프리랜서를 해도 일을 구하기 쉬웠다 일정 부분은 내가 갑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를 소모품으로 보는 것은 여전했다. 그리고 몇몇 동기들은 우리도 보고 배운 것이 좋지 않아서인지 나쁜 습관을 그대로 후배들을 다루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서 누가 그렇게 참고 일하겠는가 인류가 발전하는 것은 경제의 발전이 아니라 인권이 넓어지는 것이 듯 우리의 인권도 확대되어갔다. 그리고 나의 근무 환경도 나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부작용이 있었다. 저런 불량기업들은 여전히 단가 경쟁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견적을 내면 같은 공간 같은 장소의 단가가 천차만별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은 무형의 가치에 대한 지불을 0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사를 한다면 자재비 공사 인건비만 해서 많이 남기는 사람들이고 저가경쟁을 하는 사람들을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 비용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람들이 왜 우리나라는 인테리어 하는 사람이 사기꾼이 많고 정찰제가 안되냐고 분노한다. 냉정히 말하면 소비자가 이렇게 만들고 기업이 이렇게 만들었다. 무형가치에 지불하지 않고 그냥 싸게 어떤 것 흉내 내어 카피하고 누군가의 인건비를 착취하면서 나온 결과다. 비용을 줄이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라 어느 누군가는 그냥 공사만 따려고 안전에서 기능에서 구멍이 생긴다. 당연하다 그냥 싼 것은 없다.
스웨덴에서와 서 가장 좋았던 것을 꼽으라면 디자이너로 사는 것만은 스웨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인간적 대우는 받고 살 수 있다. 근무환경이 인간적이기도 하고 클라이언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업계에서 서로서로의 일을 존중하기 때문에 제 살 깎아먹기 식의 단가경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업계의 노조가 탄탄해서인지 아마도 그런 회사나 디자이너가 있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내가 좀 더 열심히 해 보이려고 내가 무슨 일을 쟁취하기 위하여 업계를 망치는 일은 지양한다. 아울러 디자이너가 되는 조건 또한 엄격하다. 한국처럼 갑자기 단기속성 학원을 거쳐 자격증 반을 거쳤다고 덜컥 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인정받을 경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같은 평수와 비슷한 컨디션의 매장 인테리어를 기준으로 한국에서의 단가는 스웨덴의 1/3 가격이고 뉴욕을 기준으론 1/5 가격 정도로 저렴하다. 인건비의 문제도 있지만 그만큼 디자인에 대한 수고로움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며 작업자에 대한 존중이 덜하다. 그리고 공사기간에 대한 인식과 여유로움 물리적 시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빨리빨리 문화로 급하게 완성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처럼 비슷한 속도로 공사하는 곳은 내가 경험한(디자인한) 나라 중엔 중국 빼고는 없다. 한국의 산업구조가 아무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환경과 나이 든 사람들만 남은 현장 작업자 그리고 업계의 병폐 제대로 된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클라이언트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결론은 한국 인테리어는 왜 그 모양이냐는 괴물을 낳는 것이다.
한동안 한국에서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이 유행했었고 너도나도 북유럽 디자인이라며 콘셉트를 들고 나왔다. 나는 솔직히 실소를 금치 못했다. 꽤 많은 디자인들이 북유럽 디자인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였다. 우선 아파트 바닥을 타일이나 대리석으로 마감하고 북유럽 스타일이라고 할 때마다 정말 코미디 같았다. 북유럽 기후에 대한 이해도 전혀 없는 것 아닌가? 북유럽은 대체적으로 추운 나라다 차가운 타일 바닥은 그들은 욕실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서양 하면 미국이란 인식 탓인지 많은 북유럽 나라들은 우리처럼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것조차 모른다. 맨발로 타일을 밟고 싶어 할까? 추운 기후 탓에 벌레가 많지 않기에 가정집의 바닥재는 나무인 경우가 많다 춥고 연교차가 크지 않고 벌레가 많지 않은 나라의 최적의 소재다. 게다가 숲도 많다. 핀란드 하면 자작나무이고 모 유명 소설가의 책 제목이 노르웨이 숲이듯 나무는 흔한 재료도이며 그들은 집은 따뜻하길 바란다. 바닥뿐 이 아니다. 주광색 LED 등을 달고 북유럽이라고 한다. 북유럽 사람들은 이런 색 조명은 병원이라고 생각한다. 추운 나라기 때문에 따뜻한 색의 전구색 조명을 사랑하고 필수다. 특히 함께 할 수 없는 단어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예 가"북유럽식 무 몰딩 시공"같은 건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나왔다. 일부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걸레받이 배선작업을 한다. 정유라 씨가 덴마크에서 잡혔던 결정적 단서가 된 계기가 걸레받이 위에 콘센트가 붙어 있어서 그걸 본 한국 사람이 제보한 것을 떠올려보자 걸레받이 배선받을 하기 때문에 콘센트가 걸레받이 위에 있을 수 있는 거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도 개념도 모르면서 아무거나 북유럽을 붙이는 것이 웃겼다.
얼마 전에 새 인테리어 디자인 플랫폼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등록하라는 제안이 왔다 나는 제안 조건을 듣고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턱 없는 디자인 제안기간, 말도 안 되는 금액과 조건 모든 것이 총체적 난국이었다. 나는 이 조건에 누가 이런 일을 하지? 회사를 가도 이것보다는 조건이 좋을 텐데라며 혀를 찼는데 그래도 몇몇 디자이너들이 그 플랫폼에 등록을 했더라. 과연 그런 사람들이 내는 디자인이 좋을 결과물일까?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다. 나는 그 플랫폼 회사에 화가 났던 것은 첫 번째는 많이 전공자와 전문가들이 업계의 고통을 못 이겨 떠나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려는데 또 저가경쟁을 부추기는 점 그리고 디자인 비용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또한 더 화가 나는 것은 거기에 등록한 디자이너들이다. 아마도 사회초년생에 3d툴을 좀 다룰 줄 아는 시뮬레이션은 꽤 좋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 일 것이다. 하지만 공사는 그게 다가 아니다. 그 플랫폼 회사를 보며 아직도 이 업계는 멀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요새는 신진 디자이너들이 좋은 작업물과 좋은 회사를 만들어서 조금은 변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같은 디자이너라면 그런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좋은 디자이너가 늘수록 그 이익은 사용자에게도 돌아간다. 스웨덴이 그립다면 디자이너로 살았던 것을 꼽겠다 끝으로 나와 비슷한 혹은 같은 일을 하는 동료나 선배나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제발 순간의 이익을 위해 당신의 가치를 헐값에 팔지 마세요 당신이 판 헐값의 당신의 가치는 모두의 가치의 희생을 담보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