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죠
인생을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보단 좌절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 덕인지 인생에 대한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 로또, 일확천금을 농담처럼 얘기하긴 했어도 남 일이라고 늘 생각했었고, 영화 같은 상황, 운명적인 사랑. 이런 것들도 크게 기대해 본 적이 없다.
특히 유학을 떠나고 나선, 해외에서 특히 유럽에서 삶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떠나기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 때문에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부족할 줄이야.
얼마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진학한 대학교에서 비자연장이 불가하다고 통보받아 급하게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이미 이곳에서 2년을 보냈고 앞으로 2,3년은 이곳을 떠날 일이 없겠지 했는데, 약 3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적응을 다 마쳤던 독일을 떠나 현재는 헝가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약 2주 만에 3년의 독일살이를 모두 정리해야 했기에 중고거래를 하랴, 버리랴, 친구들에게 나누고, 택배로 부치느라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역시 모든 게 순탄히 흘러가지 않았다. 3박스를 픽업서비스로 신청했는데 신청된 건 하나뿐이라 두 상자가 덜렁 남아버렸다. 역시 융통성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나라답게 현장에서 신청할 수 있느냐 물어보니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택배기사는 한 박스만 싣고 사라졌다. 당장 내일 나는 비행기를 타고 영영 떠나야 하는데. 다행히 룸메와 친구가 두 박스는 자신들이 와서 봐주겠다고 해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비우고 비우고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떠나는 날 내가 들고 이동해야 하는 짐이 거의 60킬로에 육박했다. 30킬로쯤 하는 캐리어와 10킬로가 넘어가는 백팩과 이케아 가방을 바리바리 싸들고 출발했다. 이 정도쯤이야 괜찮지, 하고 생각했는데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끄는 순간 느꼈다. 3년에 가까운 세월,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걸음을 옮기는 내내 늪을 걸어 다니는 건지 무릎이 꺾기고 발이 땅속에 처박히는 듯한 느낌에 이동 중에 고꾸라지진 않을까 진심을 다해 걱정했다.
그렇게 이고 지고 헝가리로 향하다 보니 처음 독일로 갈 준비가 한창이던 때가 떠올랐다.
한국에서 독일로의 출국을 앞두고 있을 당시 직장도 병행하고 있어서 짐정리는 고사하고 캐리어도 새로 사러 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출국 사흘 전 겨우 짐을 싸기 시작했다.
독일은 한국처럼 똑같이 사계절이 있고, 그렇게 계절별로 기온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기에 부피가 큰 겨울옷은 택배로 나중에 받기로 하고 대신 겹겹이 챙겨 입을 내복과 가벼운 옷들 위주로 챙겨 담았었다. 남들은 캐리어를 두 개씩 들고도 가던데 나는 28인치 캐리어 달랑 하나, 큰 백팩에 에코백 하나.
한국에서 독일로 출발하기 며칠을 남겨두고 여행을 출발할 때 들으면 좋은 노래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한창 들었던 터라 몇 개의 노래를 저장해 놓곤 독일의 첫 집에 도착하면 이 노래를 꼭 들으며 짐 정리를 해야지. 하고 태평하게 생각했었다. 김동률의 출발, 이상은의 삶은 여행, 세븐틴의 My My 같은 노래들을 말이다. 하지만 공항에서부터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인사하며 눈물을 참는다고, 독일에 도착해선 집주인이 코로나로 입원을 해서 연락이 안 되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음악은 무슨 눈앞의 상황을 쳐내기 바빴다. 겨우겨우 다른 곳으로 수소문을 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전 세입자가 청소도 안 하고 간 건지 거미줄과 먼지가 자욱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백설공주를 보면 백설공주가 처음으로 난쟁이들의 집에 도착해서 쉴 새 없이 거미줄과 먼지를 치우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노래와 미소가 없었다는 걸 빼면 내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래는커녕 여기서 어떻게 1년을 살아야 하나 눈앞이 깜깜했었다. 차마 이 모든 상황을 엄마나 친구들에게 말할 수가 없어 괜찮다고 대충 얼버무렸었다. 도착 첫날부터 일이 꼬였다는 걸 알게 되면 다들 어마어마하게 걱정할 게 눈에 뻔하니까. 다른 건 다 청소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큰 문제가 바로 이불이었다. 이불이 없어(있긴 했으나 세탁이 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찝찝함에 덮지 않았다) 챙겨간 외투들을 겹겹이 덮고 첫 날밤 쭈그려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냥 그렇게 쭈그려 잠들어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처음인 동네를 돌아 돌아 세탁방을 갔었다. 내가 있던 도시는 그렇게 크지 않은 도시라 영어로 부연설명이 된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세탁방도 물론 모든 게 다 독일어로 쓰여있었는데 어떻게 읽을 줄을 몰라 그저 25센트씩 세 번쯤 날렸었다.
그렇게 세탁을 겨우 시작하고 기다리는 동안 구글맵을 보니 세탁소 바로 옆에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를 판매하는 카페가 있었다. 어젯밤의 설움을 달콤함으로 씻어내고자 향했지만 세탁소를 나서 가게 앞을 가보니 에그타르트 가게는 너무 작고 사람들이 북적여 말 한마디 꺼낼 용기조차 사그라들어서 입구만 서성이다 결국 다시 세탁방으로 들어와 멍하게 시간을 보냈었다. 그 와중에 내가 걱정된 친구가 영상통화를 걸어줬는데 애써 웃으면서 대답했으나 한국에 있을 땐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무력감이 뼈저리게 느껴져 속이 말이 아니었었다.
그렇게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3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세탁방 설명도 못 읽어 돈을 날리던 때가 무색하게 너무 잘 적응을 해 이곳을 집이라고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1년 반 만에 한국에 들어갔을 때 독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할 때쯤 ‘이제 집 가야지’라고 내가 얘기하고도 속으로 놀랐었다. 편하게 속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기고, 한국처럼 우리들의 단톡방이 생기고. 함께하는 일상에 익숙해져, 이러한 날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쯤 비자연장불가를 통보받았을 때 내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그런 곳을 떠나 쫓기듯 이사를 해야 했으니 그때의 심정은 묘사하기 참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을 앞둔 슬픈 감정과 별개로 눈물은 나지 않았다. 떠나기 전 날 마지막으로 늘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던 것처럼 내 방에 모두 모여 피자를 시켜 먹고, 카드게임을 하며 헤어졌다. 마치 내일도 볼 것처럼. 또다시 우리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날 거고, 밥도, 커피도 같이 마실 거잖아 하는 것처럼. 우리는 꼭 다시 볼 거야.라는 확신이 있어서일까. 아쉽긴 해도 슬프진 않은 행복한 이별이었다.
그래, 처음엔 그랬었지.. 하는 아련한 감상에 젖어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공항이었다. 기차역까지 마중을 해준 친구들 덕에 다행히도 땅에 고꾸라지거나 처박히는 일은 없었으나 부다페스트 공항에 내려서부터는 내가 모든 걸 이고 지고 가야 했었다. 와중에도 돈을 아낀다고 공항에서 바로 가는 공항버스 말고 두 번 환승해서 가야 하는 코스를 선택했던지라 정말 딱 죽을 맛이었다. 등에는 성인 여성 하나를 업고 대중교통을 두 번이나 환승해서 가야 한다는 건데 다시 되돌아보니 진짜 무슨 정신과 패기로 그랬는지 나 자신조차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환승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창 흘려듣던 노래 속 가사가 마음에 박히기 시작했다. ‘이 비에 내가 걸음이 조금 느려도, 신호들의 불 바뀜이 제멋대로 바뀌어도 모든 게 날 위한 무대의 연출이라 생각할게, 늦봄에 피는 꽃처럼 흠뻑 젖어 있다 가장 아름답게 필테니까.’
그래, 주인공은 원래 고난과 역경은 필수지… 나도 내 인생의 주인공이니까-라는 어쩌면 오그라드는 생각을 덤덤히 했었다. 놀랍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더라.
그 덕에 이렇게 글을 쓸게 생기지 않았는가.
처음 연고하나 없는 독일로 간다고 나고 자란 곳을 떠났을 때 나의 모습은 꼭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같았다. 하지만 헝가리로 이사를 앞두고선 이사 전부터 연락하며 잘 될 거라고 응원해 주던 친구들, 헝가리에 도착했을 땐 마중 나와주고, 짐을 함께 들어준 언니오빠들 덕에 옷자락을 덮고서 서러움을 뭇매 삼켰던 독일과는 많은게 바뀌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첫날과 헝가리의 첫날이 겹쳐 보이며 지난 시간 속 내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자랐는지 확인할 수 있는 날이었다.